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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어부들이 개척한 뱃길의 역사
임병식수필가
에헤야 술비야/어기영차 뱃길이야 울고 간다 울릉도야/알고 간다 아랫녘아 (중략 ) 돛을 달고 노니다가/울릉도로 향해 가면고향 생각 간절하다 울릉도를 가서 보면/에헤야 술비야좋은 나무 탐진 미역/구석구석 가득 찼네(이하생략).
이 노래는 오래토록 거문도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노동요(勞動謠) 술비소리다. 힘차면서 역동적인 소리다. 이 소리는 어부들이 협동하여 어로작업을 하면서 불렀던 노랫소리다.
지금은 예전과는 달리 많이 시들해 졌지만 이 노래는 지금도 축제 현장에서 재현되어 이어져 오고 있다.
이 노래는 그물을 손질하거나, 고기를 잡아 올릴 때, 노를 지으면서 불러진 노래지만 가사를 음미하노라면 이 지역 뱃사람들의 애환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예전에 멀리 울릉도와 독도까지 나아가 뱃길을 열고 어장을 개척했던 것이다. 그래서 진취적인 기상이 가득하다.
이 노랫말에 담긴 내용처럼 일찍이 거문도와 초도 사람들은 눈길을 멀리 돌렸다. 남녘 바다에만 한정해 살지 않고 멀리까지 나아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개척한 어장이 울릉도와 독도어장이었다. 그곳에서 고기도 잡고 좋은 목재를 구하여 실어 왔던 것이다. 동력선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그 먼 곳까지 진출했을까. 생각만 해도 놀랍기만 하다.
그때는 풍선배로 돛을 달고 노를 저어가던 때가 아닌가. 오직 근력으로서 도전정신을 발휘하지 않으면 아니 되던 때다. 그런 상황에서 망망대해를 누빈 것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풍향을 잘 읽고 항해술이 뛰어났던 것일까. 당시의 놀라운 항해술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거문도 초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항해술이 뛰어났다. 바다의 조류를 읽고 풍향을 예측했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손죽도와 거문도 사이의 바다가 워낙 거칠어 그 풍랑을 이겨내자면 생존전략을 터득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결국은 대단한 노하우가 된 것이다.
그런 단련이 자연스레 독자적인 항해술로 발전하고 진취성을 키우게 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울릉도와 독도를 드나든 물증은 지금도 초도마을에 남아있다. 1880경 지어진 어느 고가의 마룻장은 여느 나무와는 달리 두터운 판목으로 짜여져 있는 것이다. 인근에는 그만한 목재가 나는 곳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어디서 실어왔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울릉도에서 가져온 목재인 것이다.
또 다른 증거로는 독도(獨島)라고 불리는 지명을 들 수 있다. 전라도에서는 보통 돌덩이를 보고 ‘독’이라고 하는데 독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바로 ‘돌섬’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지금은 홀로 독(獨)자를 쓰지만 이 섬이 돌덩어리 섬인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아무튼, 먼 뱃길을 개척한 역사는 흥미롭기만 하다. 그 먼 곳까지 가는 데는 많은 것들을 고려했을 것이다. 겨울철은 샛바람이나 높새바람이 불어오므로 바람을 맞서게 되는 그 시기는 철저히 피하고, 하늬바람이나 마파람이 부는 봄철에 떠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항해 코스도 지금 많이 이용하는 손죽도와 소리도를 거쳐, 욕지도와 부산의 절영도를 통해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울릉도와 독도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더욱 해산물이 풍부했을 것이다. 특히 울릉도는 수목도 울창하여 질 좋은 목재도 마음껏 가져올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고기잡이뿐 아니라 나무를 실어오는데도 힘을 써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때 향나무도 함께 베어왔는데 이것은 제수로 귀한 대접을 받아 몇 배 이문을 남겼다고 한다. 문헌에 보면 조선은 수 세기 동안 섬을 비워 두는 공도(空島)정책을 폈다. 태종 시대 이래로 왜구의 침탈을 막고 군역을 피하거나 죄를 짓고 숨어드는 자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 어간을 이용하여 거문도 어부들이 이 어장을 개척한 것이다.
그 어간에 일본은 노략질을 그치지 않았다. 자국에서 인기가 있던 강치(바다사자)를 모조리 남획해 갔다. 당시 일본에서 강치는 대단한 인기 품목이어서 가격이 무척 비쌌다. 강치 한 마리 값이 무려 소 열 마리 값에 이르렀다. 소가 15엔일 때 강치는 무려 200엔을 호가했다.
그 바람에 잡아간 강치의 숫자가 자그마치 일만 사천여 마리나 되었다. 자료에 나와 있는 숫자이다이처럼 매력적인 어장이었는데 어찌 욕심을 내지 않겠는가. 마침 그들은 기회를 잡았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동해를 장악하고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일련의 행위가 1905년 독도를 시마네 현에 편입시키고 다께시마라 명명하여 영유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하나 이것은 명백한 침범이다. 그들이 둘러대기를 조선의 공도(空島)정책도 스스로 자국 땅이 아님을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지만, 이는 어처구니없는 괴변이다. 술비소리가 어장을 개척하고 관리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어부들이 꾸준히 지켜온 터전임을 노래가사는 여실히 담아 두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볼 때 거문도와 초도 어부들이 개척한 바다의 역사는 의미가 남다르지 않는가 한다.
돌이켜보면 거문도는 특이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구 한 말,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펴며 해양을 지배하려 들자 영국은 지체없이 동양 함대를 이 섬에 출동시켰던 것이다.
그 후로 일제 강점기에는 그들의 어업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섬에는 자랑스런 개척의 역사가 간직되어 있다.
이런 자료 하나하나를 잘 갈무리한다면 그들이 억지를 부리는 독도문제도 반박의 논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면면히 이어온 노동요와 당시 독도와 울릉도에서 가져온 것들이 역사의 사료가 될 것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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