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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신체적 결함, 숙명적 과제를 풀기 위한 절박하고 처절한 몸부림
신병은(시인)
>손상기화가
여수의 화가 손상기 유고 31주기를 맞아 예술의 섬 장도 전시관에서 10월 8일부터 11월10까지 ‘지상의 운명을 바라보는 시대정신’‘손상기의 글과 그림전’이 열리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예술가의 영원한 바람이 있다면 삶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삶의 아픔을 감싸주고 껴안아 주는 따뜻한 시선이 아닐까 싶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잔잔한 울림이 전해 오는 작품은 예술성을 떠나 우리로 하여금 삶의 진정에 닿게 한다.
괴테도 예술적 내용은 자기 자신의 생활내용이라 했듯이 예술의 소재는 번뜩이는 영감이나 광채에서 생겨나는 경우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생활 속의 발견이 중요하다. 그 발견이 내 몸이 되고 내 삶이 되고, 내 피로 흐를 때에 비로소 예술행위는 가능해진다.
자신의 욕망과 욕심, 고통까지도 어금니로 깨물어 가며 자신보다 남을 위해 울어주는 존재가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손상기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그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그가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출신이란 점과 요절한 화가라는 점, 무엇보다 그의 작품에서 만난 충격적인 인상 때문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에 관해 넌지시 물어봐도 시원하게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해온 화가들도 있었고 친구도 있었지만 그에 대한 평은 서로 달랐을 뿐만아니라, 그에 관한 아무런 예술적 평가도 이루어지지 않거나 아니면 평가절하 되어 있었다.
1994년에야 지인을 통해 샘터화랑에서 손상기 화첩을 어렵게 구입할 수 있었고, 처음으로 그에 관해 자세한 내력과 많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 자료를 정리하여 여수문학에 지역예술인 조명란을 처음으로 마련하여 “요절한 천재화가 손상기의 삶과 인생” 이란 제하의 특집을 실기도 했다.
우리 지역의 자랑스런 예술인이란 점에서 한번쯤 그를 소개하는 것도 뜻깊은 일이라 생각하고 시민들에게 그를 접해볼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손상기 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유 중의 또 하나는 그의 그림도 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그보다 그가 틈틈이 메모해 둔 글귀가 더 인상적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글을 쓰고 난 후 그림을 그린다
느낀 감수성과 추상을 정직하고 설득력 있게 기록하여 이미지의 집약을 꾀한다
나의 이 집약은 회화와 문학의 접근을 의미한다
- 작업일지 -
그는 분명 화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다
그의 문학에 관한 관심과 매력은 많은 독서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것이 그의 그림의 밑그림이 되었음을 짐작케 해 줄 뿐만아니라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언어로 이미지화하는 시적 사유과정을 거친다. 화가 스스로 작품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먼저 에스키스 하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기에 나로 하여금 더 깊은 예술적 교감을 갖게 했다.
개일 줄 모르는 날씨 되어
마음의 비가 있습니다
풀잎에 내릴 수도 없고
물을 동반치 않는 마른 비가 있습니다
떠나볼 일이옵니다
떠나볼 일이옵니다
지혜의 늪에 지는 석양을 따라
둥우리 잧는 작은 새의 날개짓 속으로
줄여진 호흡을 가다듬어 봅니다
가느다랗게 열린 외길 멀리로
지친 눈을 보내옵니다
탈진한 시인의 가슴에
욕망의 불씨를 심으옵니다
그의 마음을 적셔야겠습니다
그의 삶과 예술은 가난과 신체적 결함이라는 숙명적 과제를 풀기 위한 절박하고 처절한 몸부림에서 시작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직면한 삶의 카테고리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끊임없는 상념이 그림으로 귀착된다. 그에게 그림은 아무리 현실을 떠나려고 몸부림쳐도 결국 떠날 수 없어 지친 눈길만 떠나보낸 자리에 탈진한 욕망의 불씨를 심는 작업이자‘지혜의 늪에 지는 석양을 따라 둥우리는 찾는 작은 날개짓’이었고, 메마른 가슴을 젹셔주는 유일한 통로이자 떠날 수 없는 현실을 떠나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남쪽 끝의 항구도시 여수, 쓸어져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는 듯한 모습으로 떠있는 오동도, 녹슨 폐선이 있는 조선소..... 인생은 인내라 했는데 환상을 껴안은 사람들 틈에서 나의 유년은 시작되었다. 종전 후 10년이 채 못 되었기 때문에 그때 모두들 안고 있었던 과제는 꽁보리밥의 가난이었다.
나의 경우는 공통과제에 하나의 짐을 더 얹어 출발하였는데, 그것은 당시의 생각으론 가슴이 떡떡 막히는 신체적 불구라는 과제였다. 대단한 열등감만 내 것이었다.
아이들의 사소한 눈짓이나 별 의미 없는 몸짓하나에도 자주 다짐을 했다.
그리고는 혼자 있게 되었는데, 사물에 대한 관찰과, 잃어버린 말,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는 것으로 소화해 나갔다. 그러던 중 나에게 야릇한 프로포즈를 해온 것이 그림이었다
손상기는 여수 앞 바다의 작은 섬 연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허리를 다친 후 그는 곱추라는 자신만의 삶의 카테고리 속에서 살야야만 했다. 그의 삶은 상실 체험의 연속이었으며 친구는 물론 심지어는 말조차도 잃어버린 소외 속에서 사랑할 수도 슬퍼한 집착도 없이 보이지 않는 갈증의 언어 속에 갇혀 보냈다.
그의 삶은 말에 대한 그리움의 연속이었다.
인간에게서 말을 잃어버림은 곧 죽음과 같았으며, 말을 잃은 그에게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일그러진 운명을 그림으로 표현하므로써 그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었고, 그림은 그가 지닌 숙명적 아픔을 스스로 위안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의 시적 사유, 그림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억압된 심성에 위안을 주는 반려자였다.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그의『자라지 않는 나무』도 일찍이 그가 만난 자신의 자화상이자 반려자였다. 그 나무에 등을 기댄 독백을 통해 동병상련의 아픔을 위로 받곤 한다.
온갖 소외와 절망 속에서 시적사유야말로 그에게는 빛이었고, 구원이었으며 삶의 생채기를 덮고 꿈을 실현시키려는 욕망이었으며, 상실에 대한 극기였다.
사라진 거리에도 그림자로 서 있는
바랜 빛이 있지만
폐품된 이야기를 지우며 산다
어둔 망막이 쫒는
형태도 없는
달아나는 저 수천의 표정들
저 금빛으로 나부끼는 손길을 잊어라
형태도 없는
달아나는 저 수천의 표정들
저 금빛으로 나부끼는 손길을 잊어라
단 내음 다시 씹어 넘겨도
꺽꺽 울음으로 나오는
빈 화폭에 떨어져 누운
군청의 고함을 들어야 한다
꺽꺽 울음으로 나오는
빈 화폭에 떨어져 누운
군청의 고함을 들어야 한다
피가 엉긴 말(言)의 끝
허무의 늪에 꽂힌 뼈
살(肉) 속에 점점이 찍힌 들꽃의 비명이
아직 만나지 않은 적막을 들고 있다
허무의 늪에 꽂힌 뼈
살(肉) 속에 점점이 찍힌 들꽃의 비명이
아직 만나지 않은 적막을 들고 있다
건널목 사이에서
혈관 끝에 빛나는 신호등
빛 꺼지고 빛 깨어 다스리는 소리
그대는 타오르라 타오르리라
빛나는 별을 보아야 한다
혈관 끝에 빛나는 신호등
빛 꺼지고 빛 깨어 다스리는 소리
그대는 타오르라 타오르리라
빛나는 별을 보아야 한다
- 1975. <자라지 않는 나무여> 전문-
그의 존재는 그림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늘 빛바랜 그림자였고 그의 삶은 ‘폐품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빛나는 별을 보기 위해 온몸을 태워 현실과 꿈과 부대꼈지만 끝내 피가 엉긴 허무의 늪에서 허우적거렸고 긍정과 부정의 소용돌이 속 오직 들꽃의 비명만 있을 뿐이었다.
‘태어났다는 게 억울해서 죽을 수 없다’는 무서울 정도의 집념은 한번 살아 볼만한 세상에 대한 오기서린 외침이었다.
그의 육체가 망가져가면 갈수록 그의 예술 정신, 예술을 향한 그의 의지와 촉각은 날이 갈수록 첨예하게 번뜩였다. 숙명적 고독에다 정서적, 설화적인 사유로 억제되고 감추어진 자아를 표출한다.
‘태어났다는 게 억울해서 죽을 수 없다’는 무서울 정도의 집념은 한번 살아 볼만한 세상에 대한 오기서린 외침이었다.
그의 육체가 망가져가면 갈수록 그의 예술 정신, 예술을 향한 그의 의지와 촉각은 날이 갈수록 첨예하게 번뜩였다. 숙명적 고독에다 정서적, 설화적인 사유로 억제되고 감추어진 자아를 표출한다.
대학 졸업 후인 1973, 1974년 그는 전라북도 미술전람회 입선을 시작으로 1975년에는 구상전 공모에서 동상, 은상, 입선을 하고 1976년에는 전라북도 미술대전에서 특선, 구상공모로 은상, 한국 창작미술협회 공모전에 출품하면서 주위의 관심을 받는다.
1979년에야 서울 아현동에 있는 골목을 몇 번 돌아 허름한 건물의 지하에 그는 화실을 내고 몇몇 학생을 지도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는 가운데 업친데 덥친격으로 정신적 반려자였던 동거 중이던 연인마저도 떠나고 어린 딸과 함께 음산한 환경 속에서 더 이상 희망이라고는 없는 극한상황의 연속, 가난과 고독과의 투쟁의 연속이었다
환경이 어려운 만큼 그림에 대한 그의 집념은 강해졌고, 그 결과 1981년 동덕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가질 수 있었으며 중앙일보 주최 중앙미술 대상전에 입선하는 영광을 안았다.
1981년 이후 매년 개인전을 열었고 그가 요절할 동안 다섯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1983년에는 미술평론가들이 뽑은 “83년의 문제작가”로 선정되었으며, 고향 여수의 한길화랑에서 초대전을 가졌으며, 1984년에는 “83. 현대 문제 작가전”에 출품하였으며, 조선화랑에서 열린 “작업실의 작가 16인전” 에 초대되었으며, 국립현대 미술관 개최 해방 40년 민족사전에 출품하는 등의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리고 L.A현대화랑 초대 구상전, 샘터화랑 초대 개인전을 통해 활발한 활동으로 한 화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굳혀간다.
그러던 1985년에 발병하여 폐혈성 심부전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그의 병은 유년시절부터 누적되어온 고달프고 소외된 삶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는 병세가 호전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은 끊이질 않았고 몸이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그림에 몰두한다. 그의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어 입원하는 기간도 늘어났고, 결국 그가 예술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한창 때인 1989년 2월 11일 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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