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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의 문화칼럼

기사입력 2019.02.28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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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섭의 미학을 조형으로 풀다’
     예울마루 상반기 기획전 양해웅 초대전 진행
    삶의 현장을 거창하게 해석하고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처에 서성이는 상처받고
    허물어진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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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화가이면서 과학자가 된다
    투박하면서도 자연의 섬세함이 담겨있는 작품
    직선과 곡선, 선과 면, 평면과 공간, 상이한
    온갖 오브제 생명 향한 일원적 세계로 어울려
     
     
     
    지금 예울마루에서는 올 상반기 기획전으로 양해웅 작가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
    화화와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는 양해웅작가는 이러한 조형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점에서 일어나는 진동에서 시작되어 경계가 허물어진 놀이에서 끝이 난다.
    그 놀이는 유희본능에서 비롯된 예술혼의 추임새다.
    기존의 캔버스가 지닌 관습을 과감히 탈피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의 작품을 표현하는 용어가 그동안 화단에서 입체회화나 부조회화라 불리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평면과 입체, 원근과 색채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작업을 하면서, 대상을 기호학적 의미로 재해석하는 추상작업를 시작했고, 다양한 오브제를 통합하는 입체회화에 심취하게 된다. 추상은 곧 단순화이고 마음으로 본 생명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데는 추상작업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시류에 쉽게 편승하지 않고 한 결 같이 눈 깊은 성찰로 삶을 진단하고 해석하여 개성적인 조형미로 새로운 공감과 인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양해웅은 우리 삶의 현장을 거창하게 해석하고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처에 서성이는 상처받고 허물어진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기존의 조형적 관습을 과감히 벗어버린 작업을 한다.
    그의 조형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넘나들며 연출하는 통섭의 요리다.
    그가 입체적 금속캔버스와 목재 등에 기하학적인 직선과 곡선의 조형성을 통해 생명의 원형을 캐려하는 이유도, 자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재료와 색감으로 균형있는 공간적 조형을 추상적으로 다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을 미적으로 규명해 내기 위해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현상을 직시하면서 발견과 적용, 현상과 초월을 넘나들며 직관의 통찰로 가는 그만의 조형어법이다.
    곡선이 순환적인 생명과 생성의 모습이라면 직선은 소멸을 의미한다. 자연적인 생명의 본성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직선은 인간의 인위적인 힘이 가해진 일그러진 생명을 의미하게 된다. 
    이제 양해웅은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용을 꾀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직선적 시간과 사고의 패러다임에 대해 반성하면서 곡선이 지닌 생명의 운동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현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안겨있는 생명현상의 원형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넘나들며 만나는 통섭의 미학이다.
    그가  다도해의 섬과 바다, 그리고 해와 달에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울러 그의 작품 무인도, 섬마다 뜨는 해, 지는 달 뜨는 해, 하늘 강을 흐르는 잠들지 않은 숲, 시간의 유적, 위험한 여정, 생명의 바다 등 공간성과 시간성에 대한 내포적 의미체험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포즈가 곧 생각이고 공간이 곧 생각이다.
    그러기에 그를 일컬어 평면적 회화와 입체적 조형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전위적 작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초기에 기하학적 추상화를 중심으로 평면작업에 몰두하다 인간과 자연의 경계선상에서 느껴오던 평면의 한계성을 과감히 탈피하기 위해 94년부터 나무와 금속조형의 새로운 미를 추구하게 된다. 
    자유분망한 상상력으로 생명을 통찰하고 보듬어내는 그의 작업은 생명의 원형을 깊이와 넓이로 만나기 위한 방법적 모색이자 꼴라쥬다. 철, 스텐레스 스틸, 알루미늄, 나무, 합판, 자동차 부품, 기계 부품 등 우리의 삶과 밀접해 있는 오브제를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생을 기다리는 것들에 대한 관심도 복원과 새로운 질서 확립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배어있다.
    이처럼 그의 발견과 적용은 자연과 인간의 경계선상에서 만나는 진동에서 출발한다.
    자연주의자는 자신의 감성으로 여과한 자연 속의 동경과 꿈을 표현한다면, 자연의 안쪽을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보고 자신만의 발상법을 형상화하는 그 또한 자연주의자로 보는 것은 무방할 것이다. 다만 그의 자연관은 ‘천지天地의 기氣가 내 몸을 이루었으니 내가 천지天地의 본체本體이며 천지天地의 이理가 내 마음이 되었으니 내가 바로 천지天地의 성性“이라고 한 퇴계退溪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규명하려 한다. 
     
    그의 발상법은 시적 유추와 추상, 패턴인식에 의존하여 진행된다.
    양해웅은 삶과 생명의 원형을 자연의 순환을 따라 바라보되 그 순환의 결마다 저며 있는 원형적 생명성을 기호학적 의미로 해석해 내어 이를 역동적으로 보이면서 그 원형으로 귀환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의 이면에는 훼손되지 않은 본래적인 생명을 향한 지문指文이 깔려있다. 
    이러한 지문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원형적 생명을 복원하고, 자연과 인간의 친화적인 삶을 꿈꾸면서, 중대하고 놀라운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추상작업에 기대기도 한다. 
    자연이란 스스로의 이치와 스스로의 시공 속에서 무한한 크기를 지닌 절대세계다. 이러한 절대세계인 자연에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얼마나 될까?
    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자연적이고 인간적이고 현실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추상적인 작품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좀 더 사유하고 좀 더 자유스러운 공감대를 이루어 나의 제작 의도를 유연하게 전달하고자 함이다. 이것이 나의 노정에 대한 확신이고 또 하나의 자연을 만들어 가는 열려있는 길임을 잘 알고 있다.   - 양해웅의 작업 노트에서-
             
    그는 화가인 동시에 과학자가 된다.
    그의 자연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자연이 되는 선순환이 닿은 곳이 바로 추상이다.
    세계의 이면에 담겨있는 생성과 소멸의 선순환을 통찰함으로써 존재의 근원과 본성에 근접해 가려는 화가의 조형적 모색은 결국 통섭의 자연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 얼핏 거창한 말 같지만 그것은 온생명으로서의 자연을 펼쳐두고 그 위에 낱생명인 인간을 어떻게 기대어 둘 것인가를 고민하는 조형적 모색이다.
    인간이 자연이 될 수 있는 길은 자연의 원형으로 귀환하는 일이다.
    자연의 작은 한 부분으로서 완전히 동화됨으로써 일탈된 모든 영혼과 꿈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일찍이 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자연의 원형을 탐색하는 작업임을 헤아렸다.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질서 회복을 역사성과 공간성을 함께 모색하면서, 재현과 실체사이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상적 오브제를 조형적으로 재생시켜보려는 의도가 여기서 확인된다.
    그의 작품 속에는 투박하면서도 자연의 섬세함이 담겨있고, 직선과 곡선, 선과 면, 평면과 공간, 상이한 온갖 오브제가 생명을 향한 일원적 세계로 서로 어울려 서정추상의 조형을 이루어 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양해웅은 제 깊은 곳에 응시하면서 좀 더 깊숙하게 스스로를 향해 달려가는 그리움의 작가다.  
    그는 상처 난 인간의식을 어루만지면서 상처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고, 훼손된 자연에서 훼손된 인간의 본성을 만나고, 이를 조형탐색으로 걸러내어 치유하는 길을 제공한다.   
    그러기에 그가 늘 위치하는 곳은 어둠이다. 밤하늘이거나 장마진 곳, 그리고 사람의 자취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인도다. 처음의 모습을 보기 위해 어둠 속에 앉아 해와 달고 별을 바라보는 것이다.
    루카치는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답답해도 우리가 나아갈 길이 되는 한 올 빛이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이라고 했다.
    이 점에서 양해웅의 삶의 인식은 어둔 곳에 있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항상 밝은 곳을 향해 있기에 건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본래적인 처음을 바라보려는 안목으로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생명력을 담보하는 작업을 한다.
    그의 작업을 들여다보면 그가 나중에 정착할 곳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다.
    탄생과 존재, 삶과 소멸, 해체와 생성의 양면성을 자유롭게 오가며 본래적인 생명을 향한 미학적 접근으로 훼손된 생명의 부활을 꿈꾸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그의 회화적 오브제와 미감의 원리, 공간과 평면의 미적인 질서 확립을 보면 그가 작업의 중심에 놓아두려는 상징의 실체가 분명해진다. 
    빛과 바람의 순환이 있는가하면 인간과 자연의 어울림이 있고, 탄생의 울림이 있는가 하면 소멸의 아픈 몸짓이 보이고, 훼손된 생명의 현장이 보이는가 하면 상생과 공생의 생존이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만들기는 잃어버린 존재의 원형 찾기와 새로운 생명미감 준비에서 시작된다.
    원시적 생명이 갖는 경외와 장중함이 드러나는가 하면,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숨결과 신비로움이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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