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유적따라잡기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사적 제523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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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적따라잡기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사적 제523호(하)

여수 석보는 평지에 축조된 방형의 성곽시설...
해안지역의 관방 유적으로 이순신 관련 관광자원 활용도 높다...

 

-여수 석보는 평지에 축조된 방형의 성곽시설...
 -해안지역의 관방 유적으로 이순신 관련 관광자원 활용도 높다...

 

난중일기 중에서...

임진 418(정미) 아침에 흐림(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방이 석보창에 군사를 인솔하고 오지 않으므로 붙잡아 가두었다).

                            壬辰 四月 十八日 丁未 朝陰 (夕 順天領軍兵房 留在石堡倉 不爲領付 故捉致因禁 )

병신105(무진) 흐림(남양 아저씨가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일찍 부르기에 다녀왔다. 남해현령(박대남)과 함께 이야기 했다. 비 올

                             징후가 많다. 순천부사(배응경)은 석보창에서 잤다).

                           丙申 十月 五日 戊辰 陰 ( 南陽叔主大祭早招 故往來 與南海話 多有雨徵 順天宿石堡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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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지도에 나오는 여수석보>

여수석보는 당시 널리 축조되었던 산지나 평산지역에 마련한 성곽과 달리 평지에 마련된 방형의 소규모형태의 석보로 출발하였다. 남벽은 178m, 서벽은 171m, 북벽 186m, 동벽은 168m 내외로 성벽 전체 둘레가 703m 내외이다.

남벽은 남벽중앙의 추정 문지를 중심으로 동서방형으로 일직선으로 축조된 성벽으로 남문지의 동측 약15m 지점에 치() 또는 적대(敵臺)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고, 이런 치는 평지성에 있어서 각 방면에 성벽에 2~3개 정도는 마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한 곳만 보이고 있으며, 성벽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다른 방향의 성벽보다 양호한 편이다.

동벽은 남북방향에서 약10°정도 동남쪽으로 기울어진 직선형의 성벽으로, 현재는 성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벽의 바깥쪽에 마련된 대로를 따라 동문 쪽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다. 석보가 활용되고 있었던 시기에도 동문의 활용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동벽은 비교적 유구가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고, 동벽중앙에 동문지가 마련되어 있지만, 동벽 북쪽지역은 민가가 있었던 곳으로 성벽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다.

북벽은 다른 성벽에 비해 다소 길다. 북벽외부는 성벽가까이까지 농으로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성벽의 지대석(地臺石)까지 노출되는 등 성벽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서벽은 다른 방향의 성벽보다 보존상태가 상대적으로 나쁜 상태이며, 성벽의 중심지에 추정되는 서문지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은 곳이다. 서벽의 남쪽구간은 그간 과수원으로, 북쪽은 논으로 이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성벽가까이로 관개수로가 있고, 서남쪽의 성벽유구는 성벽의 뒤채움 돌만 남아 있는 정도로 훼손정도가 심한 편이다.

여수석보의 성문은 남문지와 동문지 등이 확인되었으니, 서문지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정확한 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여수석보는 소규모의 석보로 출발한 성곽이기 때문에 성문을 각 방향마다 모두 두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 지고 있으며, 북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남문지는 남벽중심지역에 마련되어 있는데, 4.7m 길이 8.7m 내외로 문루(門扉)는 성벽외부에서 안쪽으로 약 1.5m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로에는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문지도리석이 보이고, 박석(薄石)이 노출되어 있어 이곳에 마련된 문루는 초석을 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누문식(樓門式)형식으로 추정된다.

동문지는 동벽의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약20m 북쪽에 위치하나 명확한 문지유구가 노출된 것은 아니지만 폭4.7m 통로 폭 7.7m로 남문과 비슷한 규모로 추정된다. 문지에는 문지도리석이 보이고 내부에는 통로를 구성하는 측벽의 성돌이 보이고, 이곳의 문루도 남문지와 같은 형태의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수석보 내 성내시설에는 주로 건물지, 주거지, 연지 및 우물지 등이 조사 발굴되었다. 건물지에는 활용목적에 따라 관아 건물을 비롯한 다양한 건물과 창성(倉城)으로서 가장 상징적인 대규모의 창고(倉庫)건물지 등이 있었다고 보여 진다. 현재까지 성내 여러 곳의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으나, 그간 성내에는 지반 교란이 심하여 제대로 원상이 보이는 건물유구는 적은 편이다.

가장 남쪽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초석지의 위치에서 건물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성내 중심부에서 약간 동쪽에 위치한 곳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거주지가 26기 정도 확인되고 있다. 조선시대 석보 이전부터 생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나, 한 곳의 주거지를 시대적으로 계속 이용함으로써 건물유구나 유적이 혼재함을 알 수 있다.

성곽에서 필수적인 시설의 하나가 연지를 비롯한 취수시설이다. 여수석보에는 성내에 우물이 3개소 있다고 한다. 우물지는 성의 중심에서 남서쪽 36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면상 원형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육각에 가까운 형태이다. 내경이 1.6m이고, 외경이 2.7m 내외, 우물깊이는 2.1m, 우물을 조성하기 위해 사용된 석재는 30~40cm 정도의 할석을 사용하고 있다. 연지는 성의 서쪽중앙에서 남북으로 길게 조성된 연지유구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모를 둥글게 한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길이 20.6m, 9.5m,길이 0.9~1.4m 내외로 호안을 전부 석축으로 하지 않고, 상부의 태두리만 석축한 형식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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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석보 남문지/적대/해자/남쪽 성벽 등> 

여수석보 성외의 대표적인 시설은 해자이다. 여수석보는 평지성이기 때문에 해자의 필요성은 다른 성들에 비해 필요성이 큰 편이었다. 여수석보의 해자는 성벽에서 약 5.5m내외의 거리에 폭은 4.5~5.0m, 깊이는 1.0~1.4m내외의 석축으로 조성된 형식으로, 성의 와벽을 따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깥에 마련되어 있었다. 특히 동문지로 통하는 외부의 해자가 진입도로로 인하여 절단되어 있었고, 동문지 앞에는 해자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수 석보는 조선 시대(15세기 중반) 널리 활용되었던 산지나 평산 지역이 아닌 평지에 축조된 방형의 성곽시설인데, 3차례의 발굴조사와 학술대회 등을 통하여 유적의 성격을 확인하였다.

여수 석보는 처음에는 군사적인 방어위주의 석보(돌로 쌓은 성)에서 출발하여 점차 관청용 물자비축의 창고와 장시(시장) 기능으로 활용되는 등 다양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주목되는 유적이다.

또한 체성부(성벽의 몸체 부분)와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의 잔존상태가 양호하다. 15세기 중반 평지부에 방형으로 축조된 육군 진보(각 지방을 지키던 군사조직이 주둔하던 소규모의 성)로서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을 세워쌓기한 점, 대형의 지대석을 사용한 점 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기 힘든 시대적인 한정성·희소성을 지닌 귀중한 유적이다.

여수 석보는 조선시대 성곽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여수 석보의 성벽은 외벽 바깥쪽 1m 범위에서부터 내측의 약 4.15m~4.5m까지 약 5~5.5m 구간의 지면에 20cm 내외의 쪼갠 돌을 거칠게 다듬은 할석재와 판석재를 깔았다. 성벽 등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터에 쌓은 돌인 지대석을 놓은 후 외벽을 돌로 쌓고 그 뒷면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우는 뒤채움을 한 후 성벽의 윗부분과 성벽 안쪽으로 흙을 경사지게 덮어 마무리한 내탁법으로 축조하였다. 지대석 위에 20~30cm 가량 뒤로 물려 1~2.6m 정도의 대형 할석으로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의 성돌을 세워서 쌓는 특징을 보여 준다. 2단부터는 상부로 갈수록 작은 성돌을 사용하여 쌓은 조선시대의 성곽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으나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의 성돌을 세워쌓기한 점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양상이다. 특히 성곽의 네모서리의 각을 죽여 둥글게 처리한 점에서 다른 성곽과 차별성을 보이는 성이다.

여수 석보는 전라도 육군이 외적 방어의 임무를 맡아 보는 대표적인 요충지에 축조된 관방시설로서 기능하기 시작하여 세금을 수납하여 보관하던 창성 및 장시 등의 사회·경제적인 기능으로의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변화모습을 잘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한 복합유적이다.

여수 석보는 해안 지역의 관방시설을 비교 분석 할 수 있는 유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남해안과 순천 등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여러 교통로가 교차하는 결절점에 위치하여 군사·교통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하였고. 시공간적으로 변화가 이루어졌던 조선시대의 창성과 장시 등을 연구할 수 유적공간이다현재 여수국가산단의 진입로에 위치하여 과거의 교통로의 결절점임을 입증하고 있다. 인근의 여수 흥국사와 묘도 및 전라좌수영의 유물·유적과 연계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도를 높일 수 있는 유적이다.  

또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여수 석보(석보창)를 활용하여 여수지역에 산재해 있는 이순신 관련 유물·유적과 연계하여 호국충절의 도시 여수임을 재삼 강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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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석보 동문지내 비석>

동문지 내에 비석이 2기가 있다. 모두 전·후면이 마모되어 있지만, ‘水軍節度使李公寅熙永世不忘碑’·‘水軍節度使金公魯甲恤民善政碑라 음각되어 있다 전해진다.

여수 석보의 복원을 통하여 주변 경관을 정비하고, 여수 석보촌 민속마을 조성하여 창성과 장시의 옛 모습 등을 재현한다면 여수 석보가 가지고 있는 복합유적으로써의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다. 

 

 

-민대기 문화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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