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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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나눔과 연대, 그래도 살만…

[기고]나눔과 연대, 그래도 살만한 세상

▲최병용 위원장님 요즘 TV를 켜면 비상 계엄, 탄핵, 경제 위기 같은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뉴스만 한가득이다. 민생은 더욱 어려워지고 정치권은 대립만 거듭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느낄 수 있었던 건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들을 걱정하고 그 슬픔을 보듬고자 했던 수많은 국민들의 따뜻한 나눔과 연대 덕분이었다. 제주항공 참사는 179명의 희생자와 수많은 유가족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유가족들은 가족을 잃은 고통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도와준 자원봉사자와 관계 공무원들에게 눈물로 감사를 전했다. 물론 그들의 아픔을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겠지만 함께 울고 손을 잡으며 슬픔을 나눈 순간은 모두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주었다. 사고 현장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가 유가족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고 있었다. 환경 정화, 교통 안내와 같은 현장 활동뿐만 아니라 지치고 힘들어하는 유가족과 사고 수습을 위해 고생하는 경찰, 소방관 등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며 아픔을 함께 했다. 기업과 지자체가 긴급 물품을 지원하며 현장을 따뜻하게 만들었고 오지 못한 국민들은 전국의 분향소와 온라인 추모 공간을 통해 슬픔을 나누며 연대의 뜻을 전했다. 전라남도의회도 사고대책지원단을 구성하여 유가족의 목소리를 가까이에서 경청하며 그 아픔을 나누고자 했다. 유가족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들을 파악하고 도 차원의 신속한 대응을 요청했다. 사고 수습 후 유가족의 안정적인 삶을 위한 지원 방안도 제안했다. 이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우리를 움직이는 진정한 힘은 따뜻한 나눔과 연대라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나눔은 단순히 감동의 차원을 넘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아야 한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등과 같은 대형 사고를 계기로 촉발되는 나눔과 연대를 넘어 일상속에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적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최근 우리 지역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기부와 나눔의 참여가 줄고 있다. 경기 침체와 고물가로 인해 골목상권은 물론이고 먹자골목의 상가들에서도 ‘임대’ 현수막을 쉽게 볼 수 있다. 자영업자 4명 중 3명은 한 달에 100만 원도 벌지 못한다는 통계는 소상공인들이 겪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헌혈 인구와 연탄 기부가 크게 줄면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이 상대적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기부와 사회공헌 플랫폼의 기부금 감소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이 축소될 가능성도 크다. 이는 단순한 숫자의 감소를 넘어 사회적 연대의 약화를 의미해 더욱 우려스럽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방법은 있다. 디지털 기부 플랫폼을 활성화하여 누구나 나눔에 동참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지역 기업들이 상생 기부 캠페인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와 지자체는 세제 혜택과 홍보 지원 등 실질적인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기부자와 기부받는 이들 간의 소통을 통해 나눔의 의미를 확산시키는 노력도 중요하다. 나눔은 단순히 물질적 지원에 그치지 않는다. 서로의 아픔을 돌아보고 함께 손을 맞잡는 따뜻한 마음이다. 설 명절을 앞두고 작은 정성과 관심이 모인다면 어려운 이웃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지난해 우리는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걱정하고 위로하며 희망을 키워왔다. 이제는 더 나아가 일상속에서 나눔과 연대를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힘들수록 서로를 아끼고 돕는 나눔의 정신이야말로 이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말의 온도가 더 높아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작은 희망의 불씨를 더하는 데 동참하길 바란다. /전라남도의회 보건복지환경위원장 최병용

곽동현 칼럼 - 選擇과 責任

곽동현 칼럼 - 選擇과 責任

곽동현 (경영학 박사) 인간의 본질은 태어나면서부터(Birth) 죽는 날까지(Death) 연속된 선택(Choice)에 있다고 사르트르가 말했다. 성공보다는 실패의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인간은 자의든 타의든 운명적 선택으로 힘겨운 롤러코스터의 인생을 살아간다. 예를 들어, 자장면/짬뽕, 로또 자동/수동, 회식 /운동, 주식/채권, 태국/제주도, 진보/보수 등 일상생활에서 시시각각으로 나타나는 갈등요소이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선택엔 꼭 후회가 따른다. 내가 선택한 것이 정답이라 생각하지만 결과는 늘 오답의 연속이기에 내 탓, 남 탓 일삼으며 순간 내적 갈등을 느낀다. 하지만 어쩌면 그 오답 때문에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며 새로운 선택의 길을 또 찾게 되는 환경에 접하게 된다. 즉 선택에는 반드시 기회비용이 따르기에 결과에 승복할 수 밖에 없는 ”연속된 선택의 삶“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안타까운 일상의 선택이 또 있다. 대한민국은 유난히 선거 현수막이 난무하다시피한 나라이다. 그다지 큰 관심도 없는데 선거 시즌만 되면 죄 없는 시민들은 가려진 신호등을 찾으려 원치 않게 그 원초적인 현수막을 보게 된다. 국민의 의무라 하니 나름 원치 않는 공해를 인정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한 난리를 통해 태어난 자들이 있다. 바로 ”위정자“들이다. 국민들은 그들에게 무한한 책임을 보증으로 현수막의 주인공을 선택한 것이다. 국민 스스로가 기회비용을 지게 되는 셈이다. 수많은 현수막을 지켜보았던 국민들은 그래도 자신의 선택에 적잖은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위정자들은 방향을 바꾸지 않고 방법만 바꾸려 한다. 국민을 위한다며 개인의 입지를 위해 전력투구하는 꼴상이 지금 국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헌법 1조 2항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가로등에 억지로 묶여 춤췄던 저 현수막들의 주인공들은 국민을 위한 방향이 무엇인지 눈 뜨면서 최소 열 번 이상 외쳐야 할 문구일 것이다. 후회조차 생각할 수 없는 선택도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말살된 선택의 자유를 보게 된다.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앞둔 선택은 그들에겐 심지어 잘못된 선택조차 할 수 있는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소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인간이 누려야할 최소한의 가치인 제한된 선택마저 주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일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생명줄을 하루하루 이어갈 뿐이다. 과연 우린 어떠하였는가? 지난 2년여전 0.7%의 선택의 옳고 그름을 이제사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당선자에게 주어진 권한과 권력으로 우리(백성)의 삶의 가치와 존엄성을 해치는 당위성을 부여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를 대다수 국민들이 보았다. 독재라는 과거의 성공모델(?)을 집착하여 이전 방식을 고집하다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국가 시스템마저도 붕괴되는 현상을 국민들이 똑똑히 묵도하였다. 그들이 선택한 과거 성공모델의 패착의 결과를 우리 국민들은 역사를 통해 보증하고 있다. 어찌 지우고 싶은 기억인 국민이 국민을 해하는 동족상잔(dog-eat-dog)의 역사적 비극을 또다시 연출한단 말인가? 위대한 시민들이여! 이제는 촛불집회라 하지 말자. 우린 아무런 선택도, 비굴한 선택도, 위대한 선택도 하지 않았다. 권력을 위해 발광한 자들을 향한 후회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다. 엄동설한 우리들은 동지(同志)로 대동(大同)하여 만났을 뿐이다. 극소수의 권력자들의 만행에 희생된 죄없는 시민들의 원한의 곡성을 또다시 들어서는 아니 되기에 작금 시국의 형상이 엄동설한의 한파에 우리에게 ”울분의 합창“이란 선택을 부여했을 뿐이다. 우리 대한국민은 그들로부터 충분히 상처 받았고 동학혁명, 부마항쟁,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항쟁 등을 거치며 오로지 민주, 민중을 위해 남모를 고통을 이겨내며 ”불의에 항거“라는 혁명적 내성을 쌓아온 것이다. 이제는 제대로 그들의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에겐 위대한 선택이 지금 시작일 뿐이다. 충신과 간신은 종이 한 장 차이일 것이다. 시민들이여..간신을 솎아 낼 수 있는 선택을 하자. 자신의 입지에 집착한 위정자들이여! 정신적 자아가 무너진 사람은 결국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일 수 밖에 없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이고 국민들에게 져야할 막중한 책임인 것을 잊지 않길 당부한다. 아마 하루가 일주일 보다 더 길게 느끼고 있을 용산의 한 몽환가(夢幻家)에게 전하고 싶다. 상륙하자마자 배를 불태워 둘 중 하나의 선택한다면... 즉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만을 남겨 놓은 장군처럼 과감한 선택을 한다면... 부디 정의롭게 하기 바란다. 선택이 늦을수록 시간 감각을 잃고 만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아! 씁쓸하게도 책임의 몫은 또 국민에게 돌아가는가 보다. 0.7% 선택에 대한 가혹한 책임인 것 같다. 올바른 선택과 타당한 책임이 유기공존하는 시대를 꿈꿔본다. /곽동현

[한창진의 말] '다시 동학이다.…

[한창진의 말] '다시 동학이다.'

1974년 대학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교육대학을 제외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대학 교문에는 장갑차가 지키고 있었다. 필자가 다녔던 광주교대는 개교를 하였다. RNTC 학훈단으로 사실상 군인 신분인 것을 고려하였다. 1969년 3선 개헌에 성공한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에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12월에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1973년 1월 8일 대통령긴급조치 1, 2호를 발동하여 반체제운동을 억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3년 8월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드러나면서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유신정권에서 선포한 긴급조치 4호에 따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180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그 실체는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서 고문과 강압수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있을 수 없는 용공조작 사건이다. 2024년 12.3 비상계엄이 성공했다면 전국의 대학교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박정희가 유신독재를 통해 영구 집권하려는 것 같이, 윤석열은 왕이 되어 검찰독재자가 되려고 한 것이다. 손바닥에 쓴 왕(王)자가 말해준다. 그 무시무시한 시기 대학에 유일한 이념단체, 운동권이 '흥사단아카데미'이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도산연구반'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그 때 우리가 읽고 독서토론을 했던 책이 '동학'이다. 녹색평론 2024년 겨울호는 동학운동에 대한 4분의 전문가 글이 실렸다. 윤석열 탄핵 여의도 시국집회에서 2,30대가 주축이 된 응원봉시위는 세계가 감탄하였다. 이러한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생각할 때, 우리들을 사로잡았던 동학이 뿌리라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느꼈다. 녹색평론 김정현 대표가 겨울호 처음에 '21세기 동학운동이 요청되는 까닭'을 실은 까닭을 알 것 같다. 1980년 김대중은 백성을 하늘로 알고, 백성을 하늘과 같이 섬기는 것은 동학에서 나왔고, 민주주의 근본 정신과 일치한다고 하였다. 1892년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 운동은 1893년 보은에서 대규모 집회가 일어났고, 이것이 1894년 동학 농민봉기로 발전한다. "동학은 모심과 섬김을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개벽하는 사상운동이었다"라고 글쓴이 조성환은 '녹색평론'에서 말한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1894년 동학혁명은 분노가 폭도로 변질되는 것을 막았다. 동학이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모시는 시민들에 의한 시민 민주주의" 였다고 작가는 글을 마무리한다. 2024년 12월 젊은이들이 여의도에서 보여준 형형색색 응원봉의 민주주의, 세계가 극찬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이다. 노벨평화상감이라는 주장이 결코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윤석열 내란을 막은 시민들은 직접민주주의를 보여줬다. 언제든지 대통령직에서 끌어낼 수 있다. /한창진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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