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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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따라잡기)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사적 제 523호 (상)-민대기 문화재학박사 난중일기에도 석보창에 관한기록이 임진4월18일(정미)와 병신10월5일(무진)에 전해지고 있다. 임진4월 18일(정미) 아침에 흐림(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방이 석보창에 군사를 인솔하고 오지 않으므로 붙잡아 가두었다). 병신10월 5일(무진) 흐림(남양 아저씨가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일찍 부르기에 다녀왔다. 남해현령(박대남)과 함께 이야기 했다. 비 올 징후가 많다. 순천부사(배응경)은 석보창에서 잤다). 여수 석보(국가사적 제523호, 2012.06.22 지정)는 여수시 여천동 86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석창이라는 명칭은 남아 있지 않지만, 주변은 모두 성내마을 또는 석창이라 불린다. 이곳은 여수 각 지역과 인근 순천시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다. 석보는 외적이나 왜구의 노략질에서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석축 시설물로서, 조선시대 수많은 진보 가운데 하나였다. 진보란 흔히 군사를 주둔시키는 곳 내지 그러한 목적 아래 축조된 성보라는 의미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진보를 ‘邊堡鎭戍’ 즉 변방의 성보로서 군사가 진수하는 곳이라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 외적을 방비하고자 각급 군관의 지휘 아래 군사를 주둔시키거나 혹은 그러한 목적으로 축조된 방어시설 중 내륙의 산성을 제외한 성보들은 모아 진보라는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수 석보의 성곽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이는데,「목책으로 진흙을 바른 성(木柵途泥城)이며, 둘레는 143보」라 하였다. 여수지역에 석보가 들어서는 단초로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존재가 조선 초기 순천도호부에 위치하였다는 소위 ‘목책도니성’이다. 이 성은 현전하는 자료에 의한 석보가 등장하기 이전 여수시의 성보시설로서 기록에 전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공식기록에서 여수를 관장한 성보로는 목책도니성이 최초이며, 바로 그 뒤를 이어 석보가 등장한다. 목책도니성은 변방의 연안지역처럼 별다른 방어시설이 없는 마을의 주민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쌓은 보루였다. 『세종실록』97 (세종24년 8월4일 신유)의 기록에 따르면, 읍성과 멀리 떨어져 방어에 취약한 바닷가 촌락에다 지역별 실정에 맞추어 ‘목책이나 석보 혹은 토축’을 마련함으로써 왜적의 급작스런 출현과 노략질에 대비토록 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수 석보는 둘레가 1,479척이고, 높이는 10척 이내이며 3개의 우물이 있다」고 서술되었다. 여기서 석보란 『여지지』에 기술되어 있는바 석성이며, 여수 석보란 순천부 동쪽 60여리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과거의 여수현이다. 따라서 성곽이 세종 때는 목책이었는데, 성종 때는 석성이었다는 것으로서, 현재의 석성은 세종대에서 성종대 사이에 쌓아진 것으로 보여 진다. 여수 석보의 존재를 알리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세조 3년(1457)이다. 『세조실록』6 (세조3년 정월 16일 신사) 하삼도의 여러 가지 진포를 몸소 살핀 도순찰사 등이 보고한 조목들 가운데 – 전라도 순천 돌산포의 경우 그 동쪽에 내례가 있고, 북쪽에 여수 석보가 있는데다 바다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서 방어에도 긴요하지를 않으니, 이제 돌산포를 혁파하고 그 선군은 내례와 여도에 나눠 소속시키도록 하소서 – 에 나오는 여수 석보가 그것이다. 성종 10년(1497) 내례포에 전라좌수영을 설치하면서 16세기부터 석보창(창고)으로 기능이 변하고, 난중일기에도 석보창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여수석보는 유일하게 해안으로만 접근이 가능했고, 이를 이용해 조선 중기에는 군수물자를 제작하고,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이 되었다. 여수석보 밖에 생긴 석보촌이라는 곳은 전국에서 모여든 장인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건설한 화치 첨산에서 삼간도 애양원 쪽으로 건설된 긴 방축인 십리방천 때문에 바닷가에 있었던 여수석보의 주변은 벌판이 되었다. 여수석보는 한 변이 170m내외이고, 전체 둘레가 703m내외의 소규모의 평지 방향의 성이다. 몇 년 전까지 여수석보의 동문지 북쪽과 동쪽의 성벽에는 여러 채의 민가와 서남쪽 모퉁이지역의 성곽 상단에도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외 석보로의 주 접근로지역인 동문지 밖에도 여러 채의 민가가 있었다. 또한 석보 내에는 서쪽 성벽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밭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석보의 외부는 논으로 활용되어 잔존유구의 일부가 훼손되기도 하였다. 여수석보는 여수석보성, 석창성, 장시 등으로 변화를 거듭한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시에서는 그간 유적의 보존과 정비를 위해 적극적으로 사유지를 매입하였고, 여수석보의 정비를 위한 지표 및 발굴조사를 지금까지 총3차례 실시하였다. 2003년 대학교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등 3개의 조사기관이 성곽,해자,성내부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성벽을 비롯한 동·남문지 및 해자와 건물지 3동과 집석유구 2개소 등이 조사되었다. 2007년 서쪽지역을 중심으로 서벽과 수구,해자,건물지,우물,연못지 등이 조사되었다. 2014년부터 시작된 3차 조사에서는 중앙중심부와 나머지 부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26기의 주거지 유적 및 유물들이 조사되었다. 여수석보는 성벽과 성문 그리고 성내의 각종 건물지와 외부의 해자와 성내의 주거지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고, 현재는 유적성격의 파악이 가능한 정도로 조사가 이루어진 상태다. 특히 여수석보의 주요시설인 성벽을 비롯한 성문지, 그리고 성내 건물지 등은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유적전체가 뚜렷이 확인되는 정도로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어 다른 성곽에 비해 여전히 양호하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下) 다음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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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읽어주는 남자우동식의 詩 읽어주는 남자 ----- 매화 이성배 막, 진통이 시작 되었다 난산이다 마르고 굽은 가지까지 힘을 쓰기에는 묵은 세월이 너무 무겁다 지켜보고 있던 달빛 입술이 바짝 마르고 산파로 나선 바람 제가 더 용을 쓰고 있다 누구나 가슴에 꽃망울 하나 씩 배고 있다 그것이 꿈이던 추억이든 또는 그리움이든 만삭의 겨울 무거운 걸음으로 강을 건너고 기다림은 언제나 아픔이다 마지막 힘으로 비늘잎 찢고 불두덩이 쑤욱 돋으면 숨 죽이고 있던 별 하나 잽싸게 달려들어 꽃이 된다 >우동식시인 매화는 일찍 피기에 조매(早梅), 추운 날씨에 피어서 동매(冬梅), 눈 속에 피기에 설중매(雪中梅)라 하고, 꽃의 빛깔에 따라 하얀 것을 백매(白梅) 붉으면 홍매(紅梅)라 부르며, 꽃에 중점을 두면 매화가 되지만 열매에 중점을 두면 매실이 되는 유실수(有實樹)이다. 지리산 자락 산청군 단속사에 가면 강회백이 심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정당매(政堂梅)와 함께 그 부근에서 남명매(南冥梅)와 원정매(元正梅)등 산청삼매를 만날 수 있다. 몇 해 전 여수갈무리문학회 회원들과 문학기행을 갔을 때 640여년이 된 정당매가 고사 된 곁가지에서 핀 매화를 보면서 고매하고 은은한 향기에 압도 되었던 기억이 있다. 이성배시인은 그것을 진통 끝에 난산이라 했다. 우주의 집중으로 잉태 한 꽃의 탄생은 신비하고 위대하다. 어디에 품었다가 저 많은 꽃들을 피워낼까? 먼 길 걸어왔을 저 많은 꽃등, ‘마지막 힘으로 비늘잎 찢고 불두덩이 쑤욱 돋으면 숨죽이고 있던 별 하나 잽싸게 달려들어 꽃이 된다. 가장 먼저 남쪽에서 봄을 알리는 전령사로 추위에 굴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매화를 선비들은 매경한고불매향(梅經寒苦不賣香 )‘매화는 추위와 고통을 겪어도 향기는 팔지 않는다’하여 사군자의 으뜸으로 여겼다. 매화정신, 매혼(梅魂)을 매군(梅君)이라 하여 자네 또는 군자로 사랑했던 것이다. 중국 송나라 임포는 절강의 소호에서 처자식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에게 매화는 아내요 학은 자식 이었다. 그래서 풍류를 즐기는 이러한 삶을 매처학자(梅妻鶴子)라 했다. 막 매화꽃소식 매신(梅信)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하얗게 꽃 핀 매화나무 터널 아래서 달빛과 함께 그윽한 매화주 한잔 하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매화꽃 피려나 ‘누구나 가슴에 꽃망울 하나씩 배고 산다. 그리고 만삭의 겨울 무거운 걸음으로 강을 건너’고 반짝이는 꽃이 되고자 한다. 향기가 되고자 한다. 열매가 되고자한다. 스스로 빛나고 스스로 아름다워지고자 한다. 우동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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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광의 해양바라기2>해양쓰레기 문제와 해양오염문제 이것은 우리가 누누이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고흥과 보성과 장흥 강진 지역이 비슷한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흥이 바다가 3면으로 둘러싸여있고 나머지3개 군도 해양을 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특성이 비슷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지역을 어떻게 하든 발전시키는데 역점을 둬야하겠습니다. 지금 도시에 나가있는 분들이 다시 우리 지역으로 와서 앞으로 우리지역을 지키면서 농어촌에 여러 가지 특수한 작물이라 던가 앞으로 그동안에 우리가 해왔던 농수산생산물들 그런 것들이 계속 생산해내고 지키려면 정말로 우리지역에 환경문제가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습니다만 구제역과 AI한번 터지면 해당 지역에서 애지중지하며 아꼈던 가축들이 단 한 번에 살 처분 당하지 않습니까? 또 소비하는 도시에서는 농수축산물을 먹지 않게 됩니다. 결국은 문제는 다시 우리한테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정 바닷가에서 어패류가 오염돼있다고 생각하고 뉴스를 타고 전국에 알려지고, 해외에 알려지면 우리가 생산한 소중한 우리의 생선이나 생산물들 먹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환경을 지키는 것은 앞으로 우리를 위해서 지켜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지키면 지킨 값이 다시 우리한테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해양자원은 앞으로 우리세대 뿐만 아니라 우리 다음세대 한 테도 깨끗이 쓰고 물려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토론에 함께 해주신 고흥-보성-장흥-강진 군민여러분 감사드립니다. 해양쓰레기를 수거해가지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족한 예산이 많습니다. 제가 어제 이 토론회를 준비하다 보니까 KBS에서 서남해안 특히 해수욕장 주변으로 해서 쓰레기가 너무 심각하다는 보도를 보셨을 겁니다. 1년에 2만6천 톤씩의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는데 수거하는 쓰레기양은 40톤도 못 미친다고 합니다. 수거하는 쓰레기 이것을 또 처리할 수 있는 비용이 없기 때문에 그냥 모아만 놨지 이것을 태우거나 아니면 소각하거나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 민주당에서 이런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한번 이야기를 모아서 오늘 토론회 결과를 그대로 이것을 사장시킬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정리해서 해수부나 기획재정부 등에 올려서 우리 남해안의 쓰레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들은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다. 특히 예산문제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예산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를 해서 지금보다도 필요한 예산이 얼마만큼 필요로 하다는 것 등을 적시를 해서 우리 지역에 해양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예산이 책정될 수 있도록 힘 모아 주시길 바랍니다. *해양오염 실태 및 해결방안 토론회 *2019년 2월20일(수) 14:00 *고흥군 도양읍민 회관 3층 주관:더불어민주당/고흥-보성-장흥-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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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광양시행동하는양심청년협의회, 5.18 망언을 지속하는 자유한국당 김순례, 이종명, 김진태 의원을 규탄한다. “당장 사퇴하라!”광양시 청년들로 구성된 (사)광양시 행동하는양심청년협의회(회장 김은광, 이하 양심청)는 16일 성명서를 내고 “5.18민주화운동을 폄하하고, 망언을 일삼는 자유한국당을 규탄한다고 밝히며, 김순례, 이종명, 김진태 의원은 즉각 국회의원직에서 사퇴와 함께 강력히 비판한다.”고 밝혔다. 5.18 민주항쟁은 전두환 군부 쿠데타로 인해 전국에 집회와 시위가 이루어졌으며, 시위가 확산되자 공수부대를 투입해 광주를 짓밟고 죄없는 시민들을 총칼로 잔인하게 죽인 있어서는 안될 역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폄훼하는 미친발언을 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즉각 사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시민과 학생들이 계엄군을 향해 민주적으로 항쟁한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민주화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잇단 망언으로 법적으로 처벌받은 지만원과 함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정하는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이에 대처하는 한국당의 모습을 보며 청년들은 분노한다고 밝혔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회에서 버젓히 열린 공청회에서 망언을 일삼은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그동안 발언을 보면 김순례 의원은 2015년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을 향해 “시체장사, 거지근성”이라는 상식이하의 발언을 했고, 2018년 국감장에서는 “청소년 항문알바”, 그리고 2019년에는 5.18 유가족을 향해 “세금을 축내는 괴물집단” 이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김진태 의원도 “세월호 인양은 돈이 너무 많이 든다”며 인양하지 말자고 했고, 촛불집회를 보며 “촛불은 촛불일뿐 촛불은 불면 꺼진다.” 그리고 드디어 5.18민주항쟁을 폄훼하는 유공자명단을 제대로 가려야 한다며 망언을 일삼고 있다. 이종명 의원은 5.18민주항쟁을 폭동이라고 하면서 아무근거도 없는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국회의원으로서 역사의식이 전혀 없는 무책임한 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광양시 (사)광양시행동하는양심청년협의회(회장 김은광, 이하 양심청)는 “많은 증거서류와 함께 김영삼정부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지정된 역사를 부정하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강력한 처벌과 함께 제명 및 즉각 사퇴하라.”고 밝혔다. 이하 양심청은 2017년 광양사회 청년 80여명을 시작으로 발족하여 지역사회 청년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발굴 및 공모사업과 제안을 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꾸준한 활동을 전개중이다. ※ 사진설명 = (사)광양시행동하는양심청년협의회 임원진들이 회의를 통해 대한민국 밝은 미래를 위한 결의를 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