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8 (금)

[한창진의 말]여수산단 30개나 되는 부두는 왜 광양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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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창진의 말]여수산단 30개나 되는 부두는 왜 광양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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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는 신항과 구항이 있다. 그 신항은 언제 생겼을까? 일제가 식량과 면화를 수탈하여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철도를 놓고 항구를 만든 것이 지금의 여수역이고 여수항 신항이다.


1915년까지는 신항만 조성 계획이 없었다. 1920년대부터 관련 공사를 시작했다. 지정항이 되면 항만에 관한 각종 공사 및 행정상 처분이 조선총독부 권한이었다. 따라서 1926년 1,200원 예산을 투입해서 한 달 간 여수항 측량 조사를 하였다.


그 때까지도 지금의 구항을 중심으로 항만을 조성하려고 하였다. 남조선철도주식회사가 신항만과 광주-여수 간 철도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1928년 개발 계획을 보면 구항을 중심으로 철도 노선, 기차역을 건설하고, 교동, 중앙동 공유수면 매립한 다음 여수역과 수산물특화시장 설치 계획을 수립하였다.


신항이 생긴 것은 1923년 남조선철도주식회사가 신항 일대를 매립을 시작하면서부터다. 1929년 광주와 여수 간 철도 공사를 하고, 신항을 개발하기 위해 호안공사를 착공한다. 1930년 철도 개통, 여수-시모노세끼 연락선이 취항한다.


파도가 심해 1935년 여수항 대방파제 공사, 지금의 오동도 다리, 서방파제 공사를 한다. 그 이후 1936년 지금의 신항 일대를 더 매립한다. 이렇게 해서 생겼는데 지금도 신항이다. 신항 옆에 새로 생긴 항구를 북쪽에 있다고 해서 신북항이다. 그래서, 필자는 항구의 이름을 현실에 맞게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일제는 멀쩡한 구항, 종포, 중앙동, 교동 항구를 놔두고 신항을 만들었을까? 전라좌수영성을 허물고 신항과 잇는 도로를 만들었다. 그것은 좋은 항구가 되기 위한 입지 조건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여수항을 부산, 인천과 같은 국제항을 만들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항구는 보통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만에 들어선다. 그 만으로 통하는 입구의 유속은 빠르면 안 된다. 또 바깥 바다에서 곧바로 항구로 들이닥치는 파도를 막을 섬이나 다른 지형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수심이 깊고 조수 간만의 차가 적어야 한다.


구항은 원래 조선시대 좌수영 군함이 정박한 곳이다. 돌산도와 장군도가 천연의 방파제 노릇을 하여 항구로써 기능을 갖췄다. 유속이 빠르다는 것이 흠이 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수심이 깊지 않고 해협의 폭이 좁다.


여수산단이 조성되면서 생긴 새로운 항구를 '광양항'이라고 한다. 여천지역에 30개의 크고작은 부두가 생겼다. 국가 소유 9개, 회사 소유 13개, 기타 8개이다. 수심이 구항은 6m 이하, 신항은 7m 이하인데 비해 광양만을 매립한 여천지역 부두는 10m 내외이고, 접안시설을 바다 한 가운데에 만든 원유부두는 23.5m이다.


여수산단 부두는 좋은 조건의 부두이다. 따라서 국유와 사유 부두 22개는 대부분이 1만톤 이상의 대형선박이 접안할 수 있고, 원유부두는 32만톤까지 정박할 수 있다. 그런데 여수산단 항구를 '광양항'이라 부르고 물동량이 집계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여수산단항 또는 여천항, 삼일항으로 광양항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여수산단 부두를 찾아 답사를 하면서 여수산단은 어느 항구보다 해상물류 시설이 뛰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은 석유화학 산업이 쇠퇴한다고 해도 고부가가치의 대체산업이 들어올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현재 입주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여수를 떠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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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진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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