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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나눔 그리고 따뜻한 공존이 있는 사람-손님들 덕분에 집도 사고 장사도 잘되는 것, 사회에 환원해야 -기부는 돈이 많은 부자만이 하는 특권 아니다 -백수초밥 ‘맛있는 시간’ 화려함 속에 신선함 백수초밥 김경수 대표 한국사회에서 특히 지역사회에서 기부문화는 아직도 기업사회공헌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저 기업의 선한 이미지구축을 위해 이윤의 아주 적은 부분을 기부하여 소비자에게 ‘좋은 기업’ 이미지를 남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 마케팅에 익숙한 기부문화에 큰 기업이 아닌 지역의 작은 초밥식당, 그저 평범한 부부가 각각 1억원 씩 기부했던 통 큰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있다. 다음은 백수초밥 김경수대표의 일문일답이다. -김경수 대표님도 일억 원 이상 기부, 사모님 차정례여사님도 일억 원 이상 기부, 즐기면서 기부하신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는데요. 기부를 어떤 형태로 하신 건가요? >제가 9년 정도 매월 2백만원 씩 모 단체에 기부를 했고 그 외 기부를 시작한 것은 약 15년 정도 된 것 같아요. -15년 이상을 꾸준히 일정 금액 기부를 하셨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처음에 자산어보라는 횟집을 차려서 월세 2백만원씩을 내고 장사를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손님들이 많이 오셔서 건물을 사게 되었고 그래서 손님들 덕분에 집도 사고 장사도 잘되는 것이니 적지만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식당을 하다 보니 시간은 없고 그래서 몸으로 하는 봉사가 아닌 기부를 하는 봉사를 택했습니다. >기부를 한 번씩 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15년을 그것도 부부가 릴레이로 함께 하는 게 보통 의지로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차정례여사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제 아내는 식당에서 일하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라서 모임도 많지 않습니다. 어쩌다 모임에 나갈 때면 옷도 그냥 평범하게 입고 비싼 옷도 입지 않습니다. 생일에 좋은 옷 한 벌 사주려고 하면 자신은 싼 옷을 입어도 친구들이 어느 메이커냐면서 비싼 옷인 줄 안다면서 그냥 웃는 사람입니다. >자녀분들도 부모님의 선행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요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고 있습니다. 딸은 외국에서 공부 중이고 아들은 현재 요식업을 오픈하려고 준비중입니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부모의 기부활동을 보고 자랐으니 마인드도 저절로 따라와 주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릴 때는 엄마가 어쩌다 학교에 올 때 예쁘고 화려하게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때도 있었답니다. 아내는 그 때도 식당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고 비싼 옷을 사 입을 돈이 있다면 기부를 했었거든요. 제 아내 차정례여사의 이해와 함께 가는 인생이 없었다면 저의 기부도 멈췄을 겁니다. 아내를 존경하고, 또한 이해를 해주고 이제는 함께 해주는 아들과 딸에게도 고마워요. >정기적으로 매월 기부하시는 것 외에도 여러 곳에 기부를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고향이 강진이라서 그 곳에 조손가장의 아이들 20명을 지속적으로 조금씩 돕고 있습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 있을 때마다 고향을 찾아가면 그 아이들에게 선물도 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1십만원, 2십만원씩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곳이 있고, 우리 지역 여러 단체에서 좋은 일 한다고 할 때 마다 함께 참여하여 작은 보탬을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백수초밥을 운영하고 계시는데요. 자산어보에 이어 백수초밥의 대박 성공 비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대박의 비결은 고객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손님이 한 번 오셨다가 불만족스럽게 생각하신다면 두 번 다시 찾지 않겠지요. 고객 스스로 만족하셔야지 제가 아무리 맛있다고 좋다고 해도 소용없잖아요. 온종일 고객이 만족하는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저와 직원들의 정성을 인정해주셔서 우리지역손님뿐만이 아니라 여수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많은 입소문이 났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제가 백수초밥을 먹어본 감상은 ‘맛있는 시간’입니다. 초밥에서 셰프의 깔끔한 솜씨와 화려함 속에 신선함이 느껴졌어요. 마지막 한 점까지 맛과 멋이 있어요. -백수 초밥의 주방은 전임수 셰프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63빌딩에서 일식당 근무하시던 분을 제가 특별히 모셔왔습니다. 음식은 일단 식자재가 신선하고 좋아야하고 그 다음은 만드는 사람의 솜씨와 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 있죠?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음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음식도 예술이고 전문적인 겁니다. 저는 백수초밥을 찾는 고객들께 일식 전문 셰프의 최고의 맛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김경수 대표님의 기부 활동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얼마 전 어느 기관에 아이들이 입을 옷을 여러 벌 기부를 하겠다고 했더니 그 곳 원장님이 “현금으로 주세요” 라고 하시더라고요. 중메이커 정도 되는 좋은 옷인데 제가 많이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거든요. 잠바 하나에 백만원 가까이 하는 비싼 고급 메이커를 저희 식구들은 입어보질 못해서 제가 뭘 모르는 걸까요? 그 원장님 말씀이 ‘우리 아이들은 비싼 메이커만 입어서 입지 않으니 돈으로 주세요’라고 했을 때 그 때 사실 많이 당황했습니다. 현금기부만을 해왔던 지난 15년이 잠시 흔들렸으니까요. 이번에 우리 부부의 1억원 기부 약속 이행이 끝났으니 정말 소외 된 곳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기부 문화 실천에는 소득과 행복지수, 기부에 대한 의식 등의 DNA가 따로 있다는 말도 있잖아요. -기부 유전자가 따로 있기야 하겠습니까? 기부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답니다. 하지만 일부는 기부 방법을 몰라서 라고도 답변한다고 합니다. 기부할 의향이 있는 긍적적인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지요. 저와 아내의 기부 활동이 여수일보를 통해 알려지면서 기부문화 확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의 인터뷰도 하게 되었습니다. 기부는 돈이 많은 부자만이 하는 특권이 아닙니다. 저는 나눔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고 믿습니다. 한국사회에서 특히 지역사회에서 기부문화는 아직도 기업사회공헌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저 기업의 선한 이미지구축을 위해 이윤의 아주 적은 부분을 기부하여 소비자에게 ‘좋은 기업’ 이미지를 남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 마케팅에 익숙한 기부문화에 큰 기업이 아닌 지역의 작은 초밥식당, 그저 평범한 부부가 각각 1억원 씩 기부했던 통 큰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있다. 다음은 백수초밥 김경수대표의 일문일답이다. -김경수 대표님도 일억 원 이상 기부, 사모님 차정례여사님도 일억 원 이상 기부, 즐기면서 기부하신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는데요. 기부를 어떤 형태로 하신 건가요? >제가 9년 정도 매월 2백만원 씩 모 단체에 기부를 했고 그 외 기부를 시작한 것은 약 15년 정도 된 것 같아요. -15년 이상을 꾸준히 일정 금액 기부를 하셨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처음에 자산어보라는 횟집을 차려서 월세 2백만원씩을 내고 장사를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손님들이 많이 오셔서 건물을 사게 되었고 그래서 손님들 덕분에 집도 사고 장사도 잘되는 것이니 적지만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식당을 하다 보니 시간은 없고 그래서 몸으로 하는 봉사가 아닌 기부를 하는 봉사를 택했습니다. >기부를 한 번씩 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15년을 그것도 부부가 릴레이로 함께 하는 게 보통 의지로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차정례여사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제 아내는 식당에서 일하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라서 모임도 많지 않습니다. 어쩌다 모임에 나갈 때면 옷도 그냥 평범하게 입고 비싼 옷도 입지 않습니다. 생일에 좋은 옷 한 벌 사주려고 하면 자신은 싼 옷을 입어도 친구들이 어느 메이커냐면서 비싼 옷인 줄 안다면서 그냥 웃는 사람입니다. >자녀분들도 부모님의 선행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요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고 있습니다. 딸은 외국에서 공부 중이고 아들은 현재 요식업을 오픈하려고 준비중입니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부모의 기부활동을 보고 자랐으니 마인드도 저절로 따라와 주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릴 때는 엄마가 어쩌다 학교에 올 때 예쁘고 화려하게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때도 있었답니다. 아내는 그 때도 식당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고 비싼 옷을 사 입을 돈이 있다면 기부를 했었거든요. 제 아내 차정례여사의 이해와 함께 가는 인생이 없었다면 저의 기부도 멈췄을 겁니다. 아내를 존경하고, 또한 이해를 해주고 이제는 함께 해주는 아들과 딸에게도 고마워요. >정기적으로 매월 기부하시는 것 외에도 여러 곳에 기부를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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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식의 <시 읽어주는 남자 >우동식의 <시 읽어주는 남자 > 목련쇼 우동식 전화가 왔다 잘사냐? 목련꽃이 피었는데 하늘궁궐 모델쇼 같다야 합장한 도도한 시선 캣워크 런어웨이 나무 끝에서 읽는 강렬한 시 그림 꽃부터 피는 지붕 한 채의 몰입 몇 초간의 사랑 후 확 저버리는 꽃불 의식을 치른 후 슬럼프를 생각하는데 또 전화 한통이 왔다 친구야 목련꽃이 다 지는데 똥 닦은 휴지 같다야 백목련 우동식 저 참한 여인네는 왜 소복을 반쯤 벗고 속치마를 휘날리고 난리야 근데 저 햇살은 왜 자꾸 몸을 더듬고 열을 올리고 지랄이야 저 바람은 왜 또 하얀 저고리를 치켜들어 올리고 자빠졌나 바람 난 봄이 미쳤나 나는 왜 또 몸이 근질근질 지랄옘병 이야 천형이야 -----詩詩한 이야기 손을 모아 기도하는 듯 소복소복 담았다가, 하얀 꽃잎을 활짝 펼치는.... 여수시 상암동에는 진달래 군락지인 명산 영취산이 있고 그 아래는 상암초등학교 교정과 상암교회가 나란히 앉아있다. 필자는 그 근처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상암교회 앞뜰에 있는 목련 나무에서 봉긋하게 기도하는 손 같은 꽃봉오리가 솟는 것을 몇 일전 보았다. 몇 년 전에 그 자리에서 너무나 목련꽃이 탐스럽고 예뻐서 심취하였다가 쓴 시가< 목련쇼>이다. 순백의 탐스러운 자태와 우아하고 귀족적이며 고고하면서도 경건하게 손을 모아 기도하는 듯 소복소복 담았다가 손을 열면서 하얀 꽃잎을 활짝 펼치는 것이 얼마나 건사한지 교회 종탑 십자가와 어울러져 경건하기까지 했다. 하늘궁궐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모델들이 모델쇼를 하는 것 같았다. 그 모델쇼는 도도했고 강렬했으며 꽃불로 타오르는 듯 뜨거웠다. 어떤 의식보다도 몰입이 되었다, 나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서 그 의식을 담았고 멀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퍼 날랐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교회앞마당 뜰에 깔려 있는 목련꽃들을 보게 되었다. 누렇게 변모되고 구겨진 모습들이 ‘똥 닦은 휴지’같았다,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이라 했지만 전화 한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화려함도 아름다움도 고고하고 품격 있는 꽃도 떨어져 버리는 것처럼 인생이 바로 그런 게 아닌 가 반추 해 보는 계기가 된다, 또 다른 한편의 시 역시, 교회 앞에 있는 상암초등학교 운동장 언저리에 있는 <백목련>을 보면서 적은 것이다. 이곳의 목련은 다른 목련이 다 지고 나면 늦게 서야 피고는 어느 목련보다 허느적 거리는 것 같다. 학교 교장선생님은 그 목련을 한참이나 검색하시더니 백목련이라 하셨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오후, 운동장 곁 팔각정에서 교장선생님과 목련차를 나누어 마시면서 고목 같은 목련나무 곁가지에서 흐드러지게 핀 목련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마치 하얀 소복을 입은 참한 여인네로 보였다. 그 여인은 속치마를 흩날리고, 햇살은 몸을 더듬거리고, 바람은 자꾸 하얀 저고리를 치켜 올리고 지랄 난리다. 봄바람이 분다. 지랄옘병 몸이 근질근질하다 천형이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추운 겨울을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는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봄비 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 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우리 따슷한 기억들 언제까지나 내 사랑이어라 내 사랑이어라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 아픈 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 ” 우리는 하노이 정상회담을 통하여 세계평화의 진정한 봄을 기대 했다. 그러나 봄은 왔지만 아직 봄은 아니다. 아픈 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지고 떠난 봄처럼 다시 봄은 오고 내 사랑 목련은 시대의 선구자로 피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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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보성작가의 춤추는 한글회화-문자가 살을 지닌 몸으로 거듭나는 세계를 펼치고 있어 한글회화를 구축한 금보성 작가 초대전이 3월28일 까지 여수미술관에서 전시중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50회 전시기념으로 1월 인천 잇다스페이스와 2월 서울 금보성아트센터 그리고 3월은 고향 여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는 “고향 여수는 심장 같아 늘 마음 설레고 꽃잎처럼 여린 곳이다. 바다와 섬을 드나드는 뱃고동 소릴 듣고서 문학의 길을 가려다 어린 스무 살에 열었던 첫 전시는 그 시절 유행했던 詩畵展처럼 그림은 詩고 詩는 그림이었다” 고 말한다. 또한 뿌리가 문학이었기에 작가로서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금작가는 회화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장르와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철학과 문학이라는 사유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이번 금보성 작가의 고향 여수에서의 전시는 한글 자음과 모음의 적합한 배열의 재구성으로, 문자가 살을 지닌 몸으로 거듭나는 세계를 펼치고 있어 지역 문화예술에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최향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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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자연이다>-2호미질은 왜 좋은가? > 경상대학교 학술연구교수 하병연 -작물 뿌리도 사람처럼 산소를 호흡한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젖는다”. 주병선 가수의 칠갑산 노래가사이다. 베적삼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콩밭 매는 풍경을 노래한 것인데 왜 이토록 힘든 노동을 감수하면서까지 호미질을 할까? 물론 최종 목표는 콩 수확량을 늘리는데 있겠지만 여기에 과학적인 요소가 숨어있다. 토양학에서는 토양 피각(Soil Crust)이라는 용어가 있다. 토양 피각 현상은 유기물이 부족한 토양에서 자주 일어나는 데 빗물이 토양에 계속 내리면 일부 토양 입자는 밀가루처럼 아주 잘게 깨져 고운 입자로 변한다. 비가 그치고 햇볕이 나면 토양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잘게 부숴진 토양 입자들끼리 서로 뭉쳐 토양 표면은 빵 껍질 조각처럼 딱딱한 층을 만든다. 이것을 토양 피각(Soil Crust) 현상이라 부른다. 영어로 빵 껍질을 ‘Crust’라 한다. 쉽게 이해하려면 빵 안쪽은 부드럽지만 빵껍질은 딱딱한 층으로 덮여 있는 바게트 빵을 상상하면 된다. 토양 피각이 발생되면 대기 중에 있는 공기가 토양 속으로 침투하기 어렵고, 또한 각종 토양 가스들이 토양 바깥으로 배출되기 어렵다. 호미질은 이런 토양 피각을 파괴함으로써 대기와 토양간의 공기와 가스 교환을 순조롭게 해준다. 작물 뿌리는 사람처럼 산소를 호흡한다. 호흡하지 못하면 질식해서 죽는다. 또한 뿌리 주변에 나쁜 토양 가스들이 많으면 뿌리가 상해 작물이 잘 자라지 못한다. 호미질은 빵조각처럼 딱딱한 토양 피각을 파괴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해준다. >박남훈 또한 호미질은 작물 뿌리 쪽으로 주변 토양을 옮겨줌으로써 북쳐기 효과가 있고 흩어져 있는 영양분을 뿌리 주변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한다. 즉 호미질을 작물 뿌리 쪽으로 둥그렇게 해줌으로서 배수 효과와 영양분 공급 효과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어 작물이 잘 자란다. 그래서 호미질을 자주 하는 집의 작물은 건강하게 잘 자란다. 거기에는 잡초 제거 이외에 과학이 숨어 있고 아낙네들의 고단함이 녹아있다. 남정네들은 호미질을 오랫동안 할 수 없다. 아마 신체 구조와 끈기 부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평생 동안 땡볕에서 흙에 살 붙이고 하루 종일 엉덩이를 끌면서 빠른 손놀림을 하며 앞으로 나가는 이런 분들을 우리는 한 분야의 전문가로 존중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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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따라잡기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사적 제523호(하)-여수 석보는 평지에 축조된 방형의 성곽시설... -해안지역의 관방 유적으로 이순신 관련 관광자원 활용도 높다... 난중일기 중에서... 임진 4월 18일(정미) 아침에 흐림(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방이 석보창에 군사를 인솔하고 오지 않으므로 붙잡아 가두었다). 壬辰 四月 十八日 丁未 朝陰 (夕 順天領軍兵房 留在石堡倉 不爲領付 故捉致因禁 ) 병신10월 5일(무진) 흐림(남양 아저씨가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일찍 부르기에 다녀왔다. 남해현령(박대남)과 함께 이야기 했다. 비 올 징후가 많다. 순천부사(배응경)은 석보창에서 잤다). 丙申 十月 五日 戊辰 陰 ( 南陽叔主大祭早招 故往來 與南海話 多有雨徵 順天宿石堡倉 ) <고지도에 나오는 여수석보> 여수석보는 당시 널리 축조되었던 산지나 평산지역에 마련한 성곽과 달리 평지에 마련된 방형의 소규모형태의 석보로 출발하였다. 남벽은 178m, 서벽은 171m, 북벽 186m, 동벽은 168m 내외로 성벽 전체 둘레가 703m 내외이다. 남벽은 남벽중앙의 추정 문지를 중심으로 동서방형으로 일직선으로 축조된 성벽으로 남문지의 동측 약15m 지점에 치(雉) 또는 적대(敵臺)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고, 이런 치는 평지성에 있어서 각 방면에 성벽에 2~3개 정도는 마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한 곳만 보이고 있으며, 성벽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다른 방향의 성벽보다 양호한 편이다. 동벽은 남북방향에서 약10°정도 동남쪽으로 기울어진 직선형의 성벽으로, 현재는 성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벽의 바깥쪽에 마련된 대로를 따라 동문 쪽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다. 석보가 활용되고 있었던 시기에도 동문의 활용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동벽은 비교적 유구가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고, 동벽중앙에 동문지가 마련되어 있지만, 동벽 북쪽지역은 민가가 있었던 곳으로 성벽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다. 북벽은 다른 성벽에 비해 다소 길다. 북벽외부는 성벽가까이까지 농으로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성벽의 지대석(地臺石)까지 노출되는 등 성벽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서벽은 다른 방향의 성벽보다 보존상태가 상대적으로 나쁜 상태이며, 성벽의 중심지에 추정되는 서문지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은 곳이다. 서벽의 남쪽구간은 그간 과수원으로, 북쪽은 논으로 이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성벽가까이로 관개수로가 있고, 서남쪽의 성벽유구는 성벽의 뒤채움 돌만 남아 있는 정도로 훼손정도가 심한 편이다. 여수석보의 성문은 남문지와 동문지 등이 확인되었으니, 서문지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정확한 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여수석보는 소규모의 석보로 출발한 성곽이기 때문에 성문을 각 방향마다 모두 두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 지고 있으며, 북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남문지는 남벽중심지역에 마련되어 있는데, 폭4.7m 길이 8.7m 내외로 문루(門扉)는 성벽외부에서 안쪽으로 약 1.5m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로에는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문지도리석이 보이고, 박석(薄石)이 노출되어 있어 이곳에 마련된 문루는 초석을 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누문식(樓門式)형식으로 추정된다. 동문지는 동벽의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약20m 북쪽에 위치하나 명확한 문지유구가 노출된 것은 아니지만 폭4.7m 통로 폭 7.7m로 남문과 비슷한 규모로 추정된다. 문지에는 문지도리석이 보이고 내부에는 통로를 구성하는 측벽의 성돌이 보이고, 이곳의 문루도 남문지와 같은 형태의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수석보 내 성내시설에는 주로 건물지, 주거지, 연지 및 우물지 등이 조사 발굴되었다. 건물지에는 활용목적에 따라 관아 건물을 비롯한 다양한 건물과 창성(倉城)으로서 가장 상징적인 대규모의 창고(倉庫)건물지 등이 있었다고 보여 진다. 현재까지 성내 여러 곳의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으나, 그간 성내에는 지반 교란이 심하여 제대로 원상이 보이는 건물유구는 적은 편이다. 가장 남쪽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초석지의 위치에서 건물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성내 중심부에서 약간 동쪽에 위치한 곳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거주지가 26기 정도 확인되고 있다. 조선시대 석보 이전부터 생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나, 한 곳의 주거지를 시대적으로 계속 이용함으로써 건물유구나 유적이 혼재함을 알 수 있다. 성곽에서 필수적인 시설의 하나가 연지를 비롯한 취수시설이다. 여수석보에는 성내에 우물이 3개소 있다고 한다. 우물지는 성의 중심에서 남서쪽 36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면상 원형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육각에 가까운 형태이다. 내경이 1.6m이고, 외경이 2.7m 내외, 우물깊이는 2.1m로, 우물을 조성하기 위해 사용된 석재는 30~40cm 정도의 할석을 사용하고 있다. 연지는 성의 서쪽중앙에서 남북으로 길게 조성된 연지유구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모를 둥글게 한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길이 20.6m, 폭9.5m,길이 0.9~1.4m 내외로 호안을 전부 석축으로 하지 않고, 상부의 태두리만 석축한 형식을 띠고 있다. <여수 석보 남문지/적대/해자/남쪽 성벽 등> 여수석보 성외의 대표적인 시설은 해자이다. 여수석보는 평지성이기 때문에 해자의 필요성은 다른 성들에 비해 필요성이 큰 편이었다. 여수석보의 해자는 성벽에서 약 5.5m내외의 거리에 폭은 4.5~5.0m, 깊이는 1.0~1.4m내외의 석축으로 조성된 형식으로, 성의 와벽을 따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깥에 마련되어 있었다. 특히 동문지로 통하는 외부의 해자가 진입도로로 인하여 절단되어 있었고, 동문지 앞에는 해자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수 석보는 조선 시대(15세기 중반) 널리 활용되었던 산지나 평산 지역이 아닌 평지에 축조된 방형의 성곽시설인데, 3차례의 발굴조사와 학술대회 등을 통하여 유적의 성격을 확인하였다. 여수 석보는 처음에는 군사적인 방어위주의 석보(돌로 쌓은 성)에서 출발하여 점차 관청용 물자비축의 창고와 장시(시장) 기능으로 활용되는 등 다양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주목되는 유적이다. 또한 체성부(성벽의 몸체 부분)와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의 잔존상태가 양호하다. 15세기 중반 평지부에 방형으로 축조된 육군 진보(각 지방을 지키던 군사조직이 주둔하던 소규모의 성)로서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을 세워쌓기한 점, 대형의 지대석을 사용한 점 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기 힘든 시대적인 한정성·희소성을 지닌 귀중한 유적이다. 여수 석보는 조선시대 성곽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여수 석보의 성벽은 외벽 바깥쪽 1m 범위에서부터 내측의 약 4.15m~4.5m까지 약 5~5.5m 구간의 지면에 20cm 내외의 쪼갠 돌을 거칠게 다듬은 할석재와 판석재를 깔았다. 성벽 등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터에 쌓은 돌인 지대석을 놓은 후 외벽을 돌로 쌓고 그 뒷면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우는 뒤채움을 한 후 성벽의 윗부분과 성벽 안쪽으로 흙을 경사지게 덮어 마무리한 내탁법으로 축조하였다. 지대석 위에 20~30cm 가량 뒤로 물려 1~2.6m 정도의 대형 할석으로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의 성돌을 세워서 쌓는 특징을 보여 준다. 2단부터는 상부로 갈수록 작은 성돌을 사용하여 쌓은 조선시대의 성곽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으나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의 성돌을 세워쌓기한 점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양상이다. 특히 성곽의 네모서리의 각을 죽여 둥글게 처리한 점에서 다른 성곽과 차별성을 보이는 성이다. 여수 석보는 전라도 육군이 외적 방어의 임무를 맡아 보는 대표적인 요충지에 축조된 관방시설로서 기능하기 시작하여 세금을 수납하여 보관하던 창성 및 장시 등의 사회·경제적인 기능으로의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변화모습을 잘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한 복합유적이다. 여수 석보는 해안 지역의 관방시설을 비교 분석 할 수 있는 유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남해안과 순천 등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여러 교통로가 교차하는 결절점에 위치하여 군사·교통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하였고. 시공간적으로 변화가 이루어졌던 조선시대의 창성과 장시 등을 연구할 수 유적공간이다. 현재 여수국가산단의 진입로에 위치하여 과거의 교통로의 결절점임을 입증하고 있다. 인근의 여수 흥국사와 묘도 및 전라좌수영의 유물·유적과 연계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도를 높일 수 있는 유적이다. 또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여수 석보(석보창)를 활용하여 여수지역에 산재해 있는 이순신 관련 유물·유적과 연계하여 ‘호국충절의 도시 여수’임을 재삼 강조할 수 있다. <여수 석보 동문지내 비석> 동문지 내에 비석이 2기가 있다. 모두 전·후면이 마모되어 있지만, ‘水軍節度使李公寅熙永世不忘碑’·‘水軍節度使金公魯甲恤民善政碑’라 음각되어 있다 전해진다. 여수 석보의 복원을 통하여 주변 경관을 정비하고, 여수 석보촌 민속마을 조성하여 창성과 장시의 옛 모습 등을 재현한다면 여수 석보가 가지고 있는 복합유적으로써의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다. -민대기 문화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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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의 문화칼럼‘통섭의 미학을 조형으로 풀다’ 예울마루 상반기 기획전 양해웅 초대전 진행삶의 현장을 거창하게 해석하고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처에 서성이는 상처받고 허물어진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 ------------------------------------------------------------------ 그는 화가이면서 과학자가 된다투박하면서도 자연의 섬세함이 담겨있는 작품직선과 곡선, 선과 면, 평면과 공간, 상이한온갖 오브제 생명 향한 일원적 세계로 어울려 지금 예울마루에서는 올 상반기 기획전으로 양해웅 작가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 화화와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는 양해웅작가는 이러한 조형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점에서 일어나는 진동에서 시작되어 경계가 허물어진 놀이에서 끝이 난다. 그 놀이는 유희본능에서 비롯된 예술혼의 추임새다. 기존의 캔버스가 지닌 관습을 과감히 탈피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의 작품을 표현하는 용어가 그동안 화단에서 입체회화나 부조회화라 불리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평면과 입체, 원근과 색채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작업을 하면서, 대상을 기호학적 의미로 재해석하는 추상작업를 시작했고, 다양한 오브제를 통합하는 입체회화에 심취하게 된다. 추상은 곧 단순화이고 마음으로 본 생명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데는 추상작업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시류에 쉽게 편승하지 않고 한 결 같이 눈 깊은 성찰로 삶을 진단하고 해석하여 개성적인 조형미로 새로운 공감과 인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양해웅은 우리 삶의 현장을 거창하게 해석하고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처에 서성이는 상처받고 허물어진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기존의 조형적 관습을 과감히 벗어버린 작업을 한다. 그의 조형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넘나들며 연출하는 통섭의 요리다.그가 입체적 금속캔버스와 목재 등에 기하학적인 직선과 곡선의 조형성을 통해 생명의 원형을 캐려하는 이유도, 자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재료와 색감으로 균형있는 공간적 조형을 추상적으로 다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을 미적으로 규명해 내기 위해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현상을 직시하면서 발견과 적용, 현상과 초월을 넘나들며 직관의 통찰로 가는 그만의 조형어법이다. 곡선이 순환적인 생명과 생성의 모습이라면 직선은 소멸을 의미한다. 자연적인 생명의 본성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직선은 인간의 인위적인 힘이 가해진 일그러진 생명을 의미하게 된다. 이제 양해웅은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용을 꾀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오늘날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직선적 시간과 사고의 패러다임에 대해 반성하면서 곡선이 지닌 생명의 운동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현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안겨있는 생명현상의 원형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다.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넘나들며 만나는 통섭의 미학이다.그가 다도해의 섬과 바다, 그리고 해와 달에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아울러 그의 작품 무인도, 섬마다 뜨는 해, 지는 달 뜨는 해, 하늘 강을 흐르는 잠들지 않은 숲, 시간의 유적, 위험한 여정, 생명의 바다 등 공간성과 시간성에 대한 내포적 의미체험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포즈가 곧 생각이고 공간이 곧 생각이다.그러기에 그를 일컬어 평면적 회화와 입체적 조형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전위적 작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초기에 기하학적 추상화를 중심으로 평면작업에 몰두하다 인간과 자연의 경계선상에서 느껴오던 평면의 한계성을 과감히 탈피하기 위해 94년부터 나무와 금속조형의 새로운 미를 추구하게 된다. 자유분망한 상상력으로 생명을 통찰하고 보듬어내는 그의 작업은 생명의 원형을 깊이와 넓이로 만나기 위한 방법적 모색이자 꼴라쥬다. 철, 스텐레스 스틸, 알루미늄, 나무, 합판, 자동차 부품, 기계 부품 등 우리의 삶과 밀접해 있는 오브제를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생을 기다리는 것들에 대한 관심도 복원과 새로운 질서 확립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배어있다.이처럼 그의 발견과 적용은 자연과 인간의 경계선상에서 만나는 진동에서 출발한다. 자연주의자는 자신의 감성으로 여과한 자연 속의 동경과 꿈을 표현한다면, 자연의 안쪽을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보고 자신만의 발상법을 형상화하는 그 또한 자연주의자로 보는 것은 무방할 것이다. 다만 그의 자연관은 ‘천지天地의 기氣가 내 몸을 이루었으니 내가 천지天地의 본체本體이며 천지天地의 이理가 내 마음이 되었으니 내가 바로 천지天地의 성性“이라고 한 퇴계退溪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규명하려 한다. 그의 발상법은 시적 유추와 추상, 패턴인식에 의존하여 진행된다. 양해웅은 삶과 생명의 원형을 자연의 순환을 따라 바라보되 그 순환의 결마다 저며 있는 원형적 생명성을 기호학적 의미로 해석해 내어 이를 역동적으로 보이면서 그 원형으로 귀환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의 이면에는 훼손되지 않은 본래적인 생명을 향한 지문指文이 깔려있다. 이러한 지문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원형적 생명을 복원하고, 자연과 인간의 친화적인 삶을 꿈꾸면서, 중대하고 놀라운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추상작업에 기대기도 한다. 자연이란 스스로의 이치와 스스로의 시공 속에서 무한한 크기를 지닌 절대세계다. 이러한 절대세계인 자연에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얼마나 될까?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자연적이고 인간적이고 현실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추상적인 작품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좀 더 사유하고 좀 더 자유스러운 공감대를 이루어 나의 제작 의도를 유연하게 전달하고자 함이다. 이것이 나의 노정에 대한 확신이고 또 하나의 자연을 만들어 가는 열려있는 길임을 잘 알고 있다. - 양해웅의 작업 노트에서- 그는 화가인 동시에 과학자가 된다.그의 자연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자연이 되는 선순환이 닿은 곳이 바로 추상이다. 세계의 이면에 담겨있는 생성과 소멸의 선순환을 통찰함으로써 존재의 근원과 본성에 근접해 가려는 화가의 조형적 모색은 결국 통섭의 자연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 얼핏 거창한 말 같지만 그것은 온생명으로서의 자연을 펼쳐두고 그 위에 낱생명인 인간을 어떻게 기대어 둘 것인가를 고민하는 조형적 모색이다.인간이 자연이 될 수 있는 길은 자연의 원형으로 귀환하는 일이다. 자연의 작은 한 부분으로서 완전히 동화됨으로써 일탈된 모든 영혼과 꿈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 그의 작품이다.그는 일찍이 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자연의 원형을 탐색하는 작업임을 헤아렸다.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질서 회복을 역사성과 공간성을 함께 모색하면서, 재현과 실체사이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상적 오브제를 조형적으로 재생시켜보려는 의도가 여기서 확인된다. 그의 작품 속에는 투박하면서도 자연의 섬세함이 담겨있고, 직선과 곡선, 선과 면, 평면과 공간, 상이한 온갖 오브제가 생명을 향한 일원적 세계로 서로 어울려 서정추상의 조형을 이루어 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양해웅은 제 깊은 곳에 응시하면서 좀 더 깊숙하게 스스로를 향해 달려가는 그리움의 작가다. 그는 상처 난 인간의식을 어루만지면서 상처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고, 훼손된 자연에서 훼손된 인간의 본성을 만나고, 이를 조형탐색으로 걸러내어 치유하는 길을 제공한다. 그러기에 그가 늘 위치하는 곳은 어둠이다. 밤하늘이거나 장마진 곳, 그리고 사람의 자취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인도다. 처음의 모습을 보기 위해 어둠 속에 앉아 해와 달고 별을 바라보는 것이다.루카치는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답답해도 우리가 나아갈 길이 되는 한 올 빛이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이라고 했다. 이 점에서 양해웅의 삶의 인식은 어둔 곳에 있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항상 밝은 곳을 향해 있기에 건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본래적인 처음을 바라보려는 안목으로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생명력을 담보하는 작업을 한다. 그의 작업을 들여다보면 그가 나중에 정착할 곳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다. 탄생과 존재, 삶과 소멸, 해체와 생성의 양면성을 자유롭게 오가며 본래적인 생명을 향한 미학적 접근으로 훼손된 생명의 부활을 꿈꾸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그의 회화적 오브제와 미감의 원리, 공간과 평면의 미적인 질서 확립을 보면 그가 작업의 중심에 놓아두려는 상징의 실체가 분명해진다. 빛과 바람의 순환이 있는가하면 인간과 자연의 어울림이 있고, 탄생의 울림이 있는가 하면 소멸의 아픈 몸짓이 보이고, 훼손된 생명의 현장이 보이는가 하면 상생과 공생의 생존이 보인다.그러므로 그의 작품 만들기는 잃어버린 존재의 원형 찾기와 새로운 생명미감 준비에서 시작된다.원시적 생명이 갖는 경외와 장중함이 드러나는가 하면,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숨결과 신비로움이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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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 쓰레기 심각성 정부는 깨달아야”해양쓰레기 문제와 해양오염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회가 지난 20일 오후 2시 &#160;고흥군 도양읍민 회관에서 열렸다. 더불어민주당 고흥-보성-장흥-강진 지역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이번 토론회는 ‘해양오염 실태 및 해결방안’이란 주제로 김승잠 전 국회의원 발제로 진행됐다.이 자리에서 발제자는 “고흥이 바다가 3면으로 둘러싸여있고 나머지3개 군도 해양을 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특성이 비슷다. 이런 이유로 우리지역을 어떻게 하든 발전시키는데 역점을 둬야하겠다”고 강조했다.&#160;이어 “지금 도시에 나가있는 분들이 다시 우리 지역으로 와서 앞으로 우리지역을 지키면서 농어촌에 여러 가지 특수한 작물이라 던가 앞으로 그동안에 우리가 해왔던 농수산생산물들 그런 것들이 계속 생산해내고 지키려면 정말로 우리지역에 환경문제가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또한 “구제역과 AI한번 터지면 해당 지역에서 애지중지하며 아꼈던 가축들이 단 한 번에 살 처분 당하지 않는가, 또 소비하는 도시에서는 농수축산물을 먹지 않게 된다. 결국은 문제는 다시 우리한테 돌아가게 되어있다”고 강조했다.&#160;청정 바닷가에서 어패류 오염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지적했다.“환경을 지키는 것은 앞으로 우리를 위해서 지켜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잘 지키면 지킨 값이 다시 우리한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해양자원은 앞으로 우리세대 뿐만 아니라 우리 다음세대 한 테도 깨끗이 쓰고 물려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토론자들은 “해양쓰레기를 수거해가지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족한 예산이 많다. 토론회를 준비하다 보니까 KBS에서 서남해안 특히 해수욕장 주변으로 해서 쓰레기가 너무 심각하다는 보도를 봤다”고 경고했다. 1년에 2만6000톤씩의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는데 수거하는 쓰레기양은 40톤도 못 미친다고 합니다. 수거하는 쓰레기 이것을 또 처리할 수 있는 비용이 없기 때문에 그냥 모아만 놨지 이것을 태우거나 아니면 소각하거나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특히 우리 민주당에서 이런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한번 이야기를 모아서 토론회 결과를 그대로 이것을 사장시킬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다시 정리하겠고 밝혔다. 이어 “해수부나 기획재정부 등에 올려서 남해안의 쓰레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들은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다. 특히 예산문제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예산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를 해서 지금보다도 필요한 예산이 얼마만큼 필요로 하다는 것 등을 적시를 해서 우리 지역에 해양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예산이 책정될 수 있도록 힘 모아 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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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자연이다]<1>하병연 박사 (경상대학교 학술교수) 작물 심어 놓기만 하면 그냥 된다는 생각 많지만 토양도 작물 가꾸듯 가꿔야 좋은 토양이 된다심어야 할 토양에 가장 적합한 작물 선택도 중요 귀농하거나 전문 농업인으로 생활하거나, 도시 텃밭으로 도시 농업인으로 생활하려고 할 때 제일 먼저 어떤 작물을 심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막상 농사를 시작하려니 막막하다. 그래서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선배 농업인들의 경험을 학습하기도 하고 농업에 관련된 책도 구입하여 나름대로 농사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쌓는다. 또한 주변 농업인들에게 농사에 관한 노하우를 묻기도 하고 직접 재배 농지를 찾아 가기도 한다. 농사의 시작은 이렇게 관심에서부터 나온다. 하지만 뭔가 2% 부족한 게 있다. 농업 전문 서적들은 농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학문이고 일반 농민들은 주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다보니 농사의 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작물을 토양에 심어 놓기만 하면 토양이 알아서 키울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토양도 작물 가꾸듯 가꾸어야 좋은 토양이 된다. 적지적작(適地適作) 가장 알맞은 환경 조건~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함께 키우는 것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작물은 기상·토양·미생물 등 다양한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커간다. 작물의 종이 가지고 있는 유전성이 자연환경의 지배 밑에서 최대의 유전적 형질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작물의 생육 단계에 따라 가장 알맞은 환경 조건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 주어야 수확도 많아지고 품질도 좋아지기 때문이다. 작물을 키우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토양이 필요할 것이고 토양 속에 심을 작물의 종자나 모종이 필요하고 작물을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하고 또 작물 생육을 위해 햇빛, 물, 공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농사는 천(天), 지(地), 인(人)이 모두 조화롭게 관여하여야 한다. 이 중에서도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하늘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극심한 가뭄이나 태풍등과 같은 자연재해 앞에서는 토양이나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농사를 시작하기 위해 제일 먼저 고려하여야 할 사항은 바로 적지적작(適地適作)이다. 적지적작(適地適作)은 작물재배 토양을 잘 선택하여 작물을 가꾸는 것을 말한다. 즉, 작물을 선택할 때 내가 심어야 할 토양에 가장 적합한 작물을 선택하여 잘 가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농사에 있어서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적지적작(適地適作)을 하지 않아 두고두고 후회하는 농업인들을 많이 보았다. 특히 과수 작물은 초기 투자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피해는 많다. 작목과 농지 선택은 도시인들과 비교할 때 직장 선택과 같다. 한번 선택된 직장은 좀처럼 바꾸기 힘든 만큼 농업인들에게도 작목 선택은 매우 중요하고 힘들다. 그래서 가장 많이 고민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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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따라잡기)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사적 제 523호 (상)-민대기 문화재학박사 난중일기에도 석보창에 관한기록이 임진4월18일(정미)와 병신10월5일(무진)에 전해지고 있다. 임진4월 18일(정미) 아침에 흐림(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방이 석보창에 군사를 인솔하고 오지 않으므로 붙잡아 가두었다). 병신10월 5일(무진) 흐림(남양 아저씨가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일찍 부르기에 다녀왔다. 남해현령(박대남)과 함께 이야기 했다. 비 올 징후가 많다. 순천부사(배응경)은 석보창에서 잤다). 여수 석보(국가사적 제523호, 2012.06.22 지정)는 여수시 여천동 86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석창이라는 명칭은 남아 있지 않지만, 주변은 모두 성내마을 또는 석창이라 불린다. 이곳은 여수 각 지역과 인근 순천시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다. 석보는 외적이나 왜구의 노략질에서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석축 시설물로서, 조선시대 수많은 진보 가운데 하나였다. 진보란 흔히 군사를 주둔시키는 곳 내지 그러한 목적 아래 축조된 성보라는 의미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진보를 ‘邊堡鎭戍’ 즉 변방의 성보로서 군사가 진수하는 곳이라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 외적을 방비하고자 각급 군관의 지휘 아래 군사를 주둔시키거나 혹은 그러한 목적으로 축조된 방어시설 중 내륙의 산성을 제외한 성보들은 모아 진보라는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수 석보의 성곽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이는데,「목책으로 진흙을 바른 성(木柵途泥城)이며, 둘레는 143보」라 하였다. 여수지역에 석보가 들어서는 단초로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존재가 조선 초기 순천도호부에 위치하였다는 소위 ‘목책도니성’이다. 이 성은 현전하는 자료에 의한 석보가 등장하기 이전 여수시의 성보시설로서 기록에 전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공식기록에서 여수를 관장한 성보로는 목책도니성이 최초이며, 바로 그 뒤를 이어 석보가 등장한다. 목책도니성은 변방의 연안지역처럼 별다른 방어시설이 없는 마을의 주민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쌓은 보루였다. 『세종실록』97 (세종24년 8월4일 신유)의 기록에 따르면, 읍성과 멀리 떨어져 방어에 취약한 바닷가 촌락에다 지역별 실정에 맞추어 ‘목책이나 석보 혹은 토축’을 마련함으로써 왜적의 급작스런 출현과 노략질에 대비토록 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수 석보는 둘레가 1,479척이고, 높이는 10척 이내이며 3개의 우물이 있다」고 서술되었다. 여기서 석보란 『여지지』에 기술되어 있는바 석성이며, 여수 석보란 순천부 동쪽 60여리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과거의 여수현이다. 따라서 성곽이 세종 때는 목책이었는데, 성종 때는 석성이었다는 것으로서, 현재의 석성은 세종대에서 성종대 사이에 쌓아진 것으로 보여 진다. 여수 석보의 존재를 알리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세조 3년(1457)이다. 『세조실록』6 (세조3년 정월 16일 신사) 하삼도의 여러 가지 진포를 몸소 살핀 도순찰사 등이 보고한 조목들 가운데 – 전라도 순천 돌산포의 경우 그 동쪽에 내례가 있고, 북쪽에 여수 석보가 있는데다 바다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서 방어에도 긴요하지를 않으니, 이제 돌산포를 혁파하고 그 선군은 내례와 여도에 나눠 소속시키도록 하소서 – 에 나오는 여수 석보가 그것이다. 성종 10년(1497) 내례포에 전라좌수영을 설치하면서 16세기부터 석보창(창고)으로 기능이 변하고, 난중일기에도 석보창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여수석보는 유일하게 해안으로만 접근이 가능했고, 이를 이용해 조선 중기에는 군수물자를 제작하고,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이 되었다. 여수석보 밖에 생긴 석보촌이라는 곳은 전국에서 모여든 장인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건설한 화치 첨산에서 삼간도 애양원 쪽으로 건설된 긴 방축인 십리방천 때문에 바닷가에 있었던 여수석보의 주변은 벌판이 되었다. 여수석보는 한 변이 170m내외이고, 전체 둘레가 703m내외의 소규모의 평지 방향의 성이다. 몇 년 전까지 여수석보의 동문지 북쪽과 동쪽의 성벽에는 여러 채의 민가와 서남쪽 모퉁이지역의 성곽 상단에도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외 석보로의 주 접근로지역인 동문지 밖에도 여러 채의 민가가 있었다. 또한 석보 내에는 서쪽 성벽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밭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석보의 외부는 논으로 활용되어 잔존유구의 일부가 훼손되기도 하였다. 여수석보는 여수석보성, 석창성, 장시 등으로 변화를 거듭한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시에서는 그간 유적의 보존과 정비를 위해 적극적으로 사유지를 매입하였고, 여수석보의 정비를 위한 지표 및 발굴조사를 지금까지 총3차례 실시하였다. 2003년 대학교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등 3개의 조사기관이 성곽,해자,성내부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성벽을 비롯한 동·남문지 및 해자와 건물지 3동과 집석유구 2개소 등이 조사되었다. 2007년 서쪽지역을 중심으로 서벽과 수구,해자,건물지,우물,연못지 등이 조사되었다. 2014년부터 시작된 3차 조사에서는 중앙중심부와 나머지 부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26기의 주거지 유적 및 유물들이 조사되었다. 여수석보는 성벽과 성문 그리고 성내의 각종 건물지와 외부의 해자와 성내의 주거지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고, 현재는 유적성격의 파악이 가능한 정도로 조사가 이루어진 상태다. 특히 여수석보의 주요시설인 성벽을 비롯한 성문지, 그리고 성내 건물지 등은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유적전체가 뚜렷이 확인되는 정도로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어 다른 성곽에 비해 여전히 양호하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下) 다음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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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중고차 거래의 멘토’…“믿음과 신뢰를 팝니다”지난해 중고차 시장의 거래액이 30조를 넘어섰다. 중고차 거래대수가 화물 특수차를 포함해 평균 366만대로, 이는 신차 169만대의 2배 수준이다.이런 치열한 중고차 시장에서 오늘도 지역경제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자동차 시장의 멘토가 있다.여수시자동차매매협의회의 문경일 보성자동차 대표도 그 중 하나다.문경일 대표는 “과거 부와 명예의 상징이던 자동차는 성공의 아이콘이었지만 현재의 소비자들은 가성비를 따져 가치 있는 선택으로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면서 “소비자들은 새 차와 거의 같은 품질과 믿을 수 있는 중고거래가 된다면 가치 있는 선택을 하게 된다”며 중고차 거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이런 그가 지역내에서 꾸준한 봉사활동까지 펼치고 있어 귀감이 되고 있다.문 대표는 사단법인 모두모아봉사대봉사 등 여러 봉사단체에 소속돼 남다른 봉사활동으로 지역민들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 다음은 문경일 보성자동차 대표의 일문일답이다. -중고차 하면 말 그대로 누군가 쓰던 차라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믿음이 가지않는다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이렇게 중고차 시장이 활성화된 바탕이 무엇일까요? △자동차가 과거에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자동차는 성공의 아이콘이었지요. 지금도 성공하면 보다 더 좋은 자동차를 타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현재의 소비자들은 가성비를 따진다는 겁니다. 합리적인 소비를 원하는 가치소비의 시대가 왔다는 겁니다. 소비자들은 새 차와 거의 같은 품질과 믿을 수 있는 중고거래가 된다면 가치 있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소비자가 휘둘리지 않고 본인의 판단으로 소비방식을 선택한다는 말씀이신데요. 신뢰의 중고거래란 어떤 것인가요? △중고차 시장이 투명해진 것이죠. 과거 중고차 시장은 사고차인지 주행거리의 조작 등 명확한 정보가 불투명했던 어두운 흑역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불신이 깊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품질보증인증, 성능점검부 첨부, 중고차거래 실명제 등 불공정했던 과거의 시장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많은 소비자들이 선택을 하는 거지요. -새 차와 거의 같은 중고차라고도 하셨는데요 △요즘 자동차는 쉽게 고장이 나는 물건이 아닙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죠. 출시 때 성능에 문제가 있었으면 언제든지 리콜해주는 제도가 있고 이것은 중고를 샀을 때도 적용이 이어지고 있잖아요. 1~3년쯤 된 중고차는 거의 새 차나 다름없이 깨끗하고 치명적일 정도의 고장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때가 되면 교체해야하는 소모품 교체가 있을 뿐이지요. -그럼 5년 이상 10년 이상이 된 오래된 중고차일 경우, 문경일 대표께서는 어떻게 신뢰를 주셨을까요?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서비스 A/S가 우선이겠지요.중고차의 양면성이 있겠지만 대다수의 중고차 딜러들은 성심성의껏, 특히 지역사회에서는 더 철저한 AS를 하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한 달 2000㎞ 엔진 미션 보증법위로 정해져 있습니다. 저는 문제가 있다면 3개월에서 5개월까지도 AS를 해드립니다. 지역사회잖아요. 최대한 소비자의 입장에서 서비스를 해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기차나 자율주행차, 공유차의 중고매매 현황은 어떤가요? △중고차 시장에서도 친환경차 거래가 최ㅏ근 3년 사이 80%가량 증가하고 있습니다. 2016년 175대에 불과 했던 전기차가 지난해 1009대를 기록하였으니 6배로 급격하게 늘어난 거죠. 친환경 중고차 거래는 국산차와 수입차 모두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5개월까지도 관리를 해주신다는 말씀에서 문경일 대표님의 여수 중고시장 10년 동안의 성공 비결이 느껴집니다. 봉사활동도 굉장히 활발하게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사회환원이라고 말하면 너무 거창한가요?저는 대기업도 아니고 지역의 작은 중고매매상을 운영하지만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봉사와 나눔이 따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이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작은 나눔을 실천하는 좋은 분들이 제 곁에 많이 계십니다. 그 분들과 함께 저도 기쁨을 나누고 있습니다. -활동하시는 단체는 어떤 곳인가요? △네. 저의 작은 재능과 미약한 기부가 도움이 된다면 많은 분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여러 단체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사)신해양 발전협의회, 사)ECO-PLUS21, 사)모두모아봉사대, 여수경찰서시민명예경찰, 여수경찰서중앙지구대 생활안전협의회 등 여러 곳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비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 중고차 잘사는 법 무엇일까요? △싸고 좋은 차는 없습니다. 터무니없이 싸다면 의심스러운 허위매물일 가능성이 많으니 조심하세요. 제값주고 사고 제값주고 팔면 제일 좋은 중고거래가 되겠지요. 가장 기본은 국가에 정식으로 등록된 중고차 매매 전문업체를 통해 구입하는게 기본입니다. 개인 간의 거래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정보들이 있지요. 성능기록부나 차량등록증, 보험조회, 압류나 저당조회, 등을 전문매장에서 여러 가지 확인하셔야 합니다.나의 생명과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타는 차를 그냥 싸다고 확인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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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읽어주는 남자우동식의 詩 읽어주는 남자 ----- 매화 이성배 막, 진통이 시작 되었다 난산이다 마르고 굽은 가지까지 힘을 쓰기에는 묵은 세월이 너무 무겁다 지켜보고 있던 달빛 입술이 바짝 마르고 산파로 나선 바람 제가 더 용을 쓰고 있다 누구나 가슴에 꽃망울 하나 씩 배고 있다 그것이 꿈이던 추억이든 또는 그리움이든 만삭의 겨울 무거운 걸음으로 강을 건너고 기다림은 언제나 아픔이다 마지막 힘으로 비늘잎 찢고 불두덩이 쑤욱 돋으면 숨 죽이고 있던 별 하나 잽싸게 달려들어 꽃이 된다 >우동식시인 매화는 일찍 피기에 조매(早梅), 추운 날씨에 피어서 동매(冬梅), 눈 속에 피기에 설중매(雪中梅)라 하고, 꽃의 빛깔에 따라 하얀 것을 백매(白梅) 붉으면 홍매(紅梅)라 부르며, 꽃에 중점을 두면 매화가 되지만 열매에 중점을 두면 매실이 되는 유실수(有實樹)이다. 지리산 자락 산청군 단속사에 가면 강회백이 심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정당매(政堂梅)와 함께 그 부근에서 남명매(南冥梅)와 원정매(元正梅)등 산청삼매를 만날 수 있다. 몇 해 전 여수갈무리문학회 회원들과 문학기행을 갔을 때 640여년이 된 정당매가 고사 된 곁가지에서 핀 매화를 보면서 고매하고 은은한 향기에 압도 되었던 기억이 있다. 이성배시인은 그것을 진통 끝에 난산이라 했다. 우주의 집중으로 잉태 한 꽃의 탄생은 신비하고 위대하다. 어디에 품었다가 저 많은 꽃들을 피워낼까? 먼 길 걸어왔을 저 많은 꽃등, ‘마지막 힘으로 비늘잎 찢고 불두덩이 쑤욱 돋으면 숨죽이고 있던 별 하나 잽싸게 달려들어 꽃이 된다. 가장 먼저 남쪽에서 봄을 알리는 전령사로 추위에 굴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매화를 선비들은 매경한고불매향(梅經寒苦不賣香 )‘매화는 추위와 고통을 겪어도 향기는 팔지 않는다’하여 사군자의 으뜸으로 여겼다. 매화정신, 매혼(梅魂)을 매군(梅君)이라 하여 자네 또는 군자로 사랑했던 것이다. 중국 송나라 임포는 절강의 소호에서 처자식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에게 매화는 아내요 학은 자식 이었다. 그래서 풍류를 즐기는 이러한 삶을 매처학자(梅妻鶴子)라 했다. 막 매화꽃소식 매신(梅信)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하얗게 꽃 핀 매화나무 터널 아래서 달빛과 함께 그윽한 매화주 한잔 하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매화꽃 피려나 ‘누구나 가슴에 꽃망울 하나씩 배고 산다. 그리고 만삭의 겨울 무거운 걸음으로 강을 건너’고 반짝이는 꽃이 되고자 한다. 향기가 되고자 한다. 열매가 되고자한다. 스스로 빛나고 스스로 아름다워지고자 한다. 우동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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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광의 해양바라기2>해양쓰레기 문제와 해양오염문제 이것은 우리가 누누이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고흥과 보성과 장흥 강진 지역이 비슷한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흥이 바다가 3면으로 둘러싸여있고 나머지3개 군도 해양을 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특성이 비슷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지역을 어떻게 하든 발전시키는데 역점을 둬야하겠습니다. 지금 도시에 나가있는 분들이 다시 우리 지역으로 와서 앞으로 우리지역을 지키면서 농어촌에 여러 가지 특수한 작물이라 던가 앞으로 그동안에 우리가 해왔던 농수산생산물들 그런 것들이 계속 생산해내고 지키려면 정말로 우리지역에 환경문제가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습니다만 구제역과 AI한번 터지면 해당 지역에서 애지중지하며 아꼈던 가축들이 단 한 번에 살 처분 당하지 않습니까? 또 소비하는 도시에서는 농수축산물을 먹지 않게 됩니다. 결국은 문제는 다시 우리한테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정 바닷가에서 어패류가 오염돼있다고 생각하고 뉴스를 타고 전국에 알려지고, 해외에 알려지면 우리가 생산한 소중한 우리의 생선이나 생산물들 먹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환경을 지키는 것은 앞으로 우리를 위해서 지켜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지키면 지킨 값이 다시 우리한테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해양자원은 앞으로 우리세대 뿐만 아니라 우리 다음세대 한 테도 깨끗이 쓰고 물려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토론에 함께 해주신 고흥-보성-장흥-강진 군민여러분 감사드립니다. 해양쓰레기를 수거해가지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족한 예산이 많습니다. 제가 어제 이 토론회를 준비하다 보니까 KBS에서 서남해안 특히 해수욕장 주변으로 해서 쓰레기가 너무 심각하다는 보도를 보셨을 겁니다. 1년에 2만6천 톤씩의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는데 수거하는 쓰레기양은 40톤도 못 미친다고 합니다. 수거하는 쓰레기 이것을 또 처리할 수 있는 비용이 없기 때문에 그냥 모아만 놨지 이것을 태우거나 아니면 소각하거나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 민주당에서 이런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한번 이야기를 모아서 오늘 토론회 결과를 그대로 이것을 사장시킬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정리해서 해수부나 기획재정부 등에 올려서 우리 남해안의 쓰레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들은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다. 특히 예산문제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예산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를 해서 지금보다도 필요한 예산이 얼마만큼 필요로 하다는 것 등을 적시를 해서 우리 지역에 해양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예산이 책정될 수 있도록 힘 모아 주시길 바랍니다. *해양오염 실태 및 해결방안 토론회 *2019년 2월20일(수) 14:00 *고흥군 도양읍민 회관 3층 주관:더불어민주당/고흥-보성-장흥-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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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광양시행동하는양심청년협의회, 5.18 망언을 지속하는 자유한국당 김순례, 이종명, 김진태 의원을 규탄한다. “당장 사퇴하라!”광양시 청년들로 구성된 (사)광양시 행동하는양심청년협의회(회장 김은광, 이하 양심청)는 16일 성명서를 내고 “5.18민주화운동을 폄하하고, 망언을 일삼는 자유한국당을 규탄한다고 밝히며, 김순례, 이종명, 김진태 의원은 즉각 국회의원직에서 사퇴와 함께 강력히 비판한다.”고 밝혔다. 5.18 민주항쟁은 전두환 군부 쿠데타로 인해 전국에 집회와 시위가 이루어졌으며, 시위가 확산되자 공수부대를 투입해 광주를 짓밟고 죄없는 시민들을 총칼로 잔인하게 죽인 있어서는 안될 역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폄훼하는 미친발언을 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즉각 사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시민과 학생들이 계엄군을 향해 민주적으로 항쟁한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민주화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잇단 망언으로 법적으로 처벌받은 지만원과 함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정하는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이에 대처하는 한국당의 모습을 보며 청년들은 분노한다고 밝혔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회에서 버젓히 열린 공청회에서 망언을 일삼은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그동안 발언을 보면 김순례 의원은 2015년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을 향해 “시체장사, 거지근성”이라는 상식이하의 발언을 했고, 2018년 국감장에서는 “청소년 항문알바”, 그리고 2019년에는 5.18 유가족을 향해 “세금을 축내는 괴물집단” 이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김진태 의원도 “세월호 인양은 돈이 너무 많이 든다”며 인양하지 말자고 했고, 촛불집회를 보며 “촛불은 촛불일뿐 촛불은 불면 꺼진다.” 그리고 드디어 5.18민주항쟁을 폄훼하는 유공자명단을 제대로 가려야 한다며 망언을 일삼고 있다. 이종명 의원은 5.18민주항쟁을 폭동이라고 하면서 아무근거도 없는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국회의원으로서 역사의식이 전혀 없는 무책임한 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광양시 (사)광양시행동하는양심청년협의회(회장 김은광, 이하 양심청)는 “많은 증거서류와 함께 김영삼정부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지정된 역사를 부정하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강력한 처벌과 함께 제명 및 즉각 사퇴하라.”고 밝혔다. 이하 양심청은 2017년 광양사회 청년 80여명을 시작으로 발족하여 지역사회 청년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발굴 및 공모사업과 제안을 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꾸준한 활동을 전개중이다. ※ 사진설명 = (사)광양시행동하는양심청년협의회 임원진들이 회의를 통해 대한민국 밝은 미래를 위한 결의를 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