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신병은(시인) 개막식 사진. ‘제3의 자연’ 남북정원 여수출신 김금화큐레이터(금아트프로젝트대표)가 지난해 독일 베를린에 조성한 남북정원 ‘제3의 나라’ 남북정원이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아 개최된 ‘통일상(Einheitspreis) 2020’ 은상을 수상 했다. 독일연방정치교육센터(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가 주최하는 통일상은 2002년부터 2012년까지 동서독의 공동 성장에 기여하는 사회 참여 프로그램에 수여해왔다. Ein...
하병연 이학박사/시인. 국립경상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학술연구교수 우리는 지금 코로나-19(COVID-19) 시대에 살고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을 예전에는 역병이라 칭하였고 지금은 바이러스라 말한다.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진화하면서 전염 독성과 파괴력이 더욱 강해졌다. 그들도 빠르게 변화하는 지구 기후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일 것이다.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한 방책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만이 고안된 것이 아니다. 고착 생활을 선택한 식물들도 스스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것 여수한려새마을금고 상무 김충열 얼마 전 종영한 개그콘서트 프로그램 중 “황해” 라는 코너는 보이스피싱을 소재로 해 웃음을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고객님 당황하셨습니다” 라고 엉뚱한 발언을 하여 청중을 폭소케 하였습니다. 보이스피싱이 프로그램 고정 코너로 사용될 정도로 보이스피싱이 우리생활에 깊숙히 들어왔다는 것을 대변하는 겁니다. 보이스피싱의 뜻은 음성(Voice)과 개인정보(Private Data), 낚...
우동식의 詩 읽어 주는 남자고랑 하병연 시인 그는 늘 고랑과 함께 살았다 어린 그가 처음 만든 고랑은 그의 밭을 만들어 준 논갈개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고랑 수는 많아졌다 담배 고랑 만들어 자식들 가르쳤고 배추고랑 만들어 밥상 차렸다 간혹 고추 고랑 깊게 파 용돈 만들기도 했다 그는 고랑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삽으로 만들기도 했고 괭이로도 만들었다 힘이 부치면 관리기로 했고 트랙터 잘하는 젊은이도 샀다 그러는 사이 그의 몸에도 고랑이 생겼다처음에는 손에만 생기더니 이내 얼굴까지 번졌다 ...
-권진용, 문경섭, 박동화, 박성태, 조종현...다섯 작가의 '섬섬여수전' 신병은 시인 # 프롤로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전문 삶은 본질에 앞서 관계다.관계는 연결과 단절의 두 가치개념을 내포하고 있어 상황에 따라 파악되는 내용이 달라지기 마련이다.그리고 ‘멀다’ 혹은 ‘가깝다’는 거리도 있다. 이때의 거리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정서적 거리다. 강재윤 시인은 그의 섬맛 기행에서 섬은 아무리 작아도 그 ...
-미평동에서 시작한 폐기물배출지 환경정비사업 효과 톡톡 한해광 서남해안센터장 여수시 미평동(동장 장병연) 어르신들의 구슬땀에서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유치의 희망을 보았다. 미평동 전역에서 어르신들이 팔 걷고 나서서 지난 주말에 무분별하게 버려진 생활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구슬땀을 흘리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어르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쓰레기 배출이 정도가 심하다고 했다. 참여자 모두“종량제 봉투 안에는 일반쓰레기도 있지만 재활용쓰레기도 많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어르신들은 냄...
-여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문화도시 여수의 브랜드는? 신병은(시인) 글로칼리즘(glocalism)의 시대에 문화도시는 시민이 공감하고 즐거운 도시문화의 고유성과 창조력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 사회성장구조와 지속가능한 도시발전체계를 갖춘 법적 지정 도시다. 이때 도시는 시민이 문화적 삶을 실현하는 사회적 장소로서 문화로 도시를 활성화하는 모든 문화프로젝트를 뜻하면서 문화생태계구축, 도시브랜드창출, 지속가능한 문화도시 기반구축을 주요키워드로 한다.이는 문화계획을 통한 도시 발전 프로젝트로 장소(Hardwe...
-40년째 한글회화의 확장과 변용을 거듭해온 작가, 금보성 신병은(시인)금보성 작가는 나에게는 화가로서 보다는 시인으로 더 낯익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6년쯤으로 기억된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는 30대 초반의 멋진 문학청년이었고 나는 40대 초반의 장년이었다. 당시에 내가 알기로 그는 백제인이라는 필명의 시인이었으며 목회자였다. 나이를 떠나 함께 문학적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든든한 후배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가 80년대에 이미 서울에서 개인전을 두 차례나 가진 화가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