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8 (목)
-임병식작가의 수필
▲임병식작가
어디서 닭 우는 소리를 ‘고귀위(高貴位)’라 써놓고 그 뜻을 '높이 오른다'라고 풀이해 놓은 걸 보고서, 일본사람들이 유리를 구분을 하기 위해 창유리는 그라스(grass), 컵 유리는 ‘구라스’라고 한다는 말을 문득 떠올렸다. 그 착상이 기발해서였다.
한데, 이처럼 소리도 보면 그런 구별법이 필요하지 않는가 한다. 왜냐하면 소리가 느낌으로 전달되어 올 때와 ‘소음’으로 느껴질 때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둘은 뚜렷한 차이가 있다. 단순히 청각으로 울려오는 상태인데도 소리와 소음은 다르다. 즉 소리는 그냥 귀로 들려올 뿐이지만 소음은 그렇지 않고 신경을 자극한다.
소음의 한자(漢字)는 재미있다. 그 조합을 보면, '騷’자는 말(馬)과 벼룩(蚤)이 합쳐져 있다. 그러니 오죽 시끄러울 것인가.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는 여간 소란스러운 게 아니다. 예전에 지은 탓에 층간소음 차단이 안 되다 보니 위층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는 물론 말소리도 여과 없이 들려온다. 거기다 방안에서는 무슨 공방(工房)을 차려놓았는지 무시로 드릴소리가 나고 망치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해서 행여나 낮잠을 자려거나, 글이라도 쓰는 때는 온 신경이 곤두서고 견디기가 힘이 든다. 그렇지만 나는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참아내고 있다. 이유는 내가 물리적으로 그를 제지 시킬 방도가 없을뿐 더러 다른 곳으로 이사 갈 형편도 못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형편에 용케 참아내는 나를 보고 혹자는 대견해 한다.
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어차피 ‘피하지 못하고 살 거라면 그냥 그 상태를 즐기자’고 다소 소극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을 뿐이다.
그와 나는 같은 동의 아파트를 한 층 나누어 사는 입장인데 야박하게 굴 것은 또 뭐냐고 여겨버린 점도 있다. 이만하면 도를 닦는 수준일까, 나태의 한 표본일까.
황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