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1 (금)
-정원주, 풀림과 관계하기의 정직한 미학
지금 돌산에 위치한 ‘갤러리 안’에서 정원주 작가의 여수칸타타 ‘꽃과 바다가 들려주는 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8. 1일부터 9. 30일까지다.
꽃이 피는 것으로 하늘의 뜻을 읽고, 바람도 햇살도 기다림도 의지도 견딤의 미학도 읽는다면 이는 진정한 통찰, 통섭이다. 그래서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만한 음악이 없고, 자연만한 그림이 없다고 했다. 진정한 미美는 있는 그대로의 미美이자, 서로 함께 어울려있는 화和의 철학이다. 이것이 정직한 미美다.
풀리다, 스미다, 건너다, 넘나들다, 흐르다, 관계하다, 포용하다, 자유롭다, 그립다, 맑다, 투명하다, 정겹다, 명상적이다, 아포리즘, 유토피아 ......
요즘 정원주의 그림을 읽으며 경험하는 어휘들이다. 긴 겨울 지나 봄을 맞는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화和의 미학에 딱 맞는 조형어법이다. 좋은 그림, 좋은 시는 세상 모든 사물과 소통하는 언어를 구사한다. 넓고 깊은 소통의 힘을 지닌다. 입으로부터 발화되는 언어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고 전해지는 언어다.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 자연언어는 거리낌이 없이 자유로운 통섭의 언어다. 그래서 흔히 그림은 풍경 속 시를 보는 것이고, 시는 풍경 속 그림을 보는 것이라 했다.
조선시대 화가 전기의 <매화독서도>를 보면 눈덮힌 산과 언덕, 곳곳에 봄의 발자국처럼 연두색이 찍혀있고 창문 열고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과 동구 밖 찾아오는 선비는 발길소리가 들려오는 그림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마음과 보고 싶은 마음이 색으로 잘 드러나 있다. 기다리는 마음은 연두색으로 찾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기다림의 마음에 색이 있다면 아마 봄의 서정을 상징하는 연두일 것이고, 찾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열정적인 붉은 색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과연 정원주의 어휘를 색으로 표현하면 무슨 색일까. 그게 바로 정원주의 색, 정원주의 그림이리라. 이것이 바로 그의 조형어법이리라.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삶의 이미지를 풍경으로 표정 짓고 그것을 색감과 질감으로 풀어내려는 시도, 거기에다 표현하려는 피사체의 이미지를 먼저 포착해 내고 그 이미지를 오히려 시적으로 형상화하려는 것도 여느 작가들과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하늘과 바다, 산과 섬, 마을과 사람, 꽃과 나무들이 제가 지닌 고유의 풍경을 비우고 경계를 무너뜨려 하나의 완전한 새로운 풍경으로 창조된다. 경계짓지 않고 풀어져 스며들 수 있는 관계, 대상에 감흥하고 해석하는 시적 체험의 원리를 자신의 조형어법으로 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불어 사는 삶의 유토피아로 안내한다.
그의 풍경체험은 색채이미지로 풀려 서로를 넘나든다. 그러기에 그의 풍경은 화폭에 잠시 올려놓은 일회적 풍경이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람이 들락거리고 빛이 넘나드는 시적 서정의 풍경이다. 눈을 감으면 그의 풍경에선 연초록 풀잎 같은 냄새가 나는가 하면, 작은 꽃들과 새들의 속삭임, 햇살의 재잘거림이 하모니를 이룬다. 그냥 곁에 있어도 그 하모니에 젖어든다. 그의 그림은 내 마음속 풍경을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옮겨놓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즉 마음의 수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탐색한 결과다. 그가 느낀 서정체험을 이미지와 형상화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준다.
우리는 오늘 느낌이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원주가 전해주는 느낌을 한글자의 언어체험으로 드러내면 화和다. 감정을 함께 느끼고 나누는 것이 화和다. 그가 전해주는 화和는 세상과 관계 맺는 일이다. 관계의 여정이다. 그리고 화和는 감정을 함께 나누는 공감이다. 내가 울었던 곳에서 그가 울고 그가 웃었던 곳에서 내가 웃는다는 의미체험이 색채이미지로 풀어져 서로를 넘나들면서 서로를 다독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살맛나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어디에서도 자유롭게 어울리고 소통하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유목주의 사유를 보여준다. 자유롭다. 그림 속 꽃이 되고 산이 되고 나무되고 섬이 된다. 풍경 속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의 요즘 조형적 감도는 표현과 형식에서 그만큼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삶의 원형질과 결을 짚어내려면 아무래도 그 스스로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억새며 들풀들의 웃음 사이사이마다 여백을 끼워두고 그 안에서 온갖 잡념도 번거로움도 숨김없이 풀어내려는 저 만만한 작업을 보고 있으면 우리 사이에도 여백으로 자리하는 틈이 있어 서로의 때묻은 마음도 피곤한 어깨도 환하게 풀어질 것만 같다. 참 고요하고 투명한 가을저녁 같은 그림이다. 그에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는 한결같이 절실하고 투명하기까지 하다. 보고 있으며 호흡까지도 한결 편해진다. 그것은 그늘진 세상도 밝은 세상도 정원주의 마음 안에서는 이미 하나의 모습으로 거듭나고 변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건강하고 풋풋한 풀꽃들이 촘촘하게 모여 소리치고 있는, 어려울수록 빈틈없이 몸을 맞대면서 따스한 체온을 나눌 줄 아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풀어내려 하는 이유도, 그가 근래에 와 파스텔톤의 채색화를 즐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벼운 텃치로 마띠에르 효과를 내는 기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호분으로 캔버스 바탕을 준비하고 그 위에 채색을 풀어내는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것도 수묵화에서 만나지 못했던 풀어지고 스며듬의 매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띠에르의 효과도 일찍이 그가 수묵화의 깊고 깊은 맛을 섭렵했기에 채색화로 옮겨오며 그 깊은 질감을 곁들이기 위한 미적 장치로 발현된 결과다. 조용하면서도 밝은 삶의 과정이 그대로 조형감각으로 되돌아온 결과다.
풀과 나무가 하늘을 닮고 하늘이 사람을 닮고 사람이 풀과 나무를 닮아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시로 번지고 노래로 풀어져 내린다. 사랑을 행복바이러스로 풀어 전해주는 전령사와도 같은, 그가 지닌 조형능력에 명상성을 담아내는 수련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밝게 해주며 마음의 틈마다 끼여있는 해묵은 먼지를 털어내어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그림, <여수연가>를 비롯한 봄 시리즈를 만나면 봄의 서정에 부응하면서 봄의 서정에 ‘취하다’는 화두를 던진다. 배경과 공간과 사물, 내재하는 관념까지 함께 스며들어 다분히 몽환적이면서 경계가 지워져 새로운 풍경으로 자리하는 통섭의 조형법을 풀었다. 그곳에 여수의 서정, 봄의 서정이 풍경으로 피어난다. 버스커 버스커의 ‘여수밤바다’를 감상하고, 고소동벽화마을을 걸어보고, 문득 돌아보니 오동도에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사람과 바다와 꽃이 서로를 건너고 건너면서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이런 화소를 하나하나 나누어 감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가 서로를 넘나들며 결국은 또 하나의 새로운 풍경으로 갈무리된다.
그래서 그냥 좋다.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그뿐이다.
이것이 여수의 이미지고 그가 들려주는 <여수의 연가>다.
신병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