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8 (목)
“작품 스스로가 말한다. 나 이 자리 싫어 라는 말 알아들어야하는데 힘들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작품이 원하는 자리에 다시 옮겨줘야 한다”
-한 사람의 작가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뿌리 내리고 있는 많은 나무들 중에 한 그루 나무
1. 시인이었고 지금은 화가다. 인간 금보성이 긍금하다. 나는 누구인가?
-여수에서 태어나서 여수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서울 올라와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시인이 되었고 대학 1년 때 그림으로 첫 전시를 했다. 그림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전시를 한다고 하니 편견이 있었다. 30년이 지났을 때 저 친구가 아직도 그림을 그리고 있네? 라고 말하며 신기해했다. 여수만 생각하면 온 몸에 전율이 돈다. 행복했던 시절보다는 힘들었던 시절이 더 많았다. 이런 모습으로는 고향 여수에 갈수는 없었다. 더욱 많이 노력했어야 했다. 금보성이라는 사람이 누구냐 라고 말하기 보다는 한 사람의 작가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많은 나무들 중에 한 그루 나무라고 생각한다.
최승애작가 초대전시를 위해 작품배치를 다 끝냈는데 작품 스스로가 내게 말을 한다. "나 이 자리 싫어" 라는 말을 알아들어야하는데 힘들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작품이 원하는 자리에 다시 옮겨줘야 한다. 나는 작품이 내는 소리를 소중히 여긴다.
2. 전공을 하지 않은 무명작가의 세월, 35년 동안의 과정에 외로움 짙은 길이 엿보인다.
-누군가 전시회장에 찾아와서 그림을 본 후에 “학교 어디 나왔어요?”라고 묻는 경우가 많다. 그럼 나는 “고등학교 나왔습니다”라고 답했다. 내가 신학공부를 했다고 말하면 그 과정의 길을 구구절절 설명을 하게 되더라. 그래서 언젠가 부터는 그냥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말했다. 그러면 작품에 관심을 갖던 고객들이 “아~네” 하고는 그냥 떠나갔다.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전체가 학벌과 연줄 등 조건이 따른다. 그러나 그 조건들을 극복하는 것도 내 몫이지 그들의 몫이 아니다. 그들이 그런 학벌을 묻기 전에 내가 더 좋은 그림을 그렸어야 했다. 아니면 내가 질문하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 있어야 했다. 그냥 어떤 질문을 받고 그들이 원하는 입맛에 맞추려면 내가 살아온 시절을 부정해야 한다. 내가 원해서 신학을 하고 시를 썼던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전공은 아니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은 내게 필요한 영양분이었는데 그 분들 입장에서는 비전공자라서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니 설득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냥 지나가야하는 것이다.
>인터뷰 사진. 오른쪽 금보성 작가
2. 화가의 길을 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시를 썼다. 그리운 고향 여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림은 내 조국 내 언어에 대한 소통으로 언어의 메시지다. 한글로 작업 할 수 있는 회화, 조향, 패션 모든 보여지는 것들을 표현했다.
왜 글을 쓰게 하고 왜 그림을 그리게 했는가라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을 못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 자의는 아닌 것 같다. 그냥 누군가 계속 미니까 밀어서 여기까지 왔다. 보보이지 않는 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한글을 그림으로 하지 않아서 그 건 내가 해도 되겠다 싶었다. 글을 썼던 사람이니 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색감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다. 한국은 선, 일본은 배색이다. 많은 사람들이 옷을 살 때 가장 먼저 색상, 디자인, 가격의 순으로 결정한다. 그림도 먼저 색을 본다. 아무리 잘 그려져 있어도 색을 잘못 선택하면 실패한다. 선과 색을 잘 배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처음부터 한글이었고 지금도 한글이 주제다. 그림의 형태는 가금 5년 주기로 바뀐다. 얼굴과 한글을 접목시켜보기도 한다.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슬픔이 있다. 한글이 갖고 이는 나 자신만의 역사, 놀이 등을 접목시켜 내 속에 있는 슬픔을 윷으로 던져보고 기쁨을 다시 회복하는 것들. 한글이 가지고 있는 작은 이야기지만 회화로 표현하면 보는 이로 하여금 기쁨일 수도 있고 슬픔일수도 있다.
감정이 살아나고 생명이 느껴져야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고 작업의 방향을 진화 시킨다.
3. 고향인 여수를 떠나온 지 35년이다.
-서울에서 1만9천명의 작가 전시를 했다. 그 많은 전시를 하면서 고향 여수에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을 뿌리 내릴 수 있는 공간. 문화에 대하여 심도 싶은 장이 되는 공간을 여수에 만들고 있다.
나의 뿌리는 여수이니 내가 여수에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예술가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부르고 관광명소가 되기도 한다. 나는 작가다. 예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하는 명품공간을 여수에 만들 계획이다.
4.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어떤 것인가?
-광복절 기념으로 했던 작년에 했던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했던 ‘테트라포트’ 전시회다. 지진과 전쟁, 분단의 아픔, 질병 등 인류가 격고 있는 아픔과 절망을 평화의 메시지로 전달하고자 했는데 지금도 놀라웠던 것이 미국의 메트로폴리탄에 왔던 사람들이 신기해하면서도 위로를 받았다.
테트라포트는 한글 ‘ㅅ’을 의미한다. 해변을 지키는 방파제처럼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하고 아픔을 위로하는 한글 조형물의 메시지를 외국 사람들도 전달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내 심장소리에 나 스스로 놀랬다.
아, 허투로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천천히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작가로써 부담은 되지만 전시에 대하여 짜임새, 작업 등을 다시 되잡는 계기가 됐다.
5. 한국작가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렸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나는 그림을 빨리 그리는 편이다. 30년 동안 부보님, 형제, 친구들은 내가 그림을 그리는지 몰랐다. 화가로 활동한다는 걸 아는지 5년 정도 됐다. 신학공부 하고 선교사를 했던 나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밝히지 않았다.
캠퍼스와 도구들이 필요했다.
사무실 파티션이 버려져 있으면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두워지면 주워 와서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은 비가 와서 버려진 파티션이 다 젖었는데 주워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가져가자고 하고 비에 젖은 파티션을 들고 갈 때 처량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공중전화박스에 걸린 책을 철끈을 끊고 몰래 훔쳐와서 드로잉을 해야 했다. 가난이 가장 힘들었다. 그러나 부끄럽지는 않다.
화가도 종교의 성직자처럼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기 위하여 베르셀로나로 여행을 간다. 미완성의 상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가우디 건축물을 보기 위하여 스페인으로 여행을 간다.
화가 한 사람이 잘하면 전 세계의 사람을 부를 수 있다. 나는 예술의 힘을 믿는다. 앞으로도 작가로써 작업하기를 소망한다.
최향란기자. 사진 김영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