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8 (목)

손죽도(巽竹島)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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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손죽도(巽竹島) 생각

-손죽도 앞바다 지키다가 손가락 끊어서 옷에 절명시를 쓴 소년장수 이대원
-국가방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하는 아픈 역사의 현장

-손죽도 앞바다 지키다가 손가락 끊어서 옷에  절명시를 쓴 소년장수 이대원
-국가방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하는 아픈 역사의 현장

 

손죽도(巽竹島) 생각 임병식.jpg

  >임병식 수필가
 

손죽도(巽竹島)는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는 섬이다. 손괘손(巽)자는 신에게 제사지내는 형상을 형상화한 글자인데 바람을 의미하며 유순하다, 사양하다, 공손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거기다가 대나무(竹)자가 들어있으니, 역설적으로 바람이 잔잔하기를 염원하여 지어진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 섬은 평온하거나 잔잔하지 않았다. 역사의 굽이굽이에 아픔이 새겨진 섬이다. 손죽도를 생각하면 우선 역사적인 한 인물의 발자취가 떠오른다. 바로 소년장수 이대원 장군이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 이곳 손죽도 앞바다를 지키다가 전사를 했다. 젋디 젊은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였다.

알려진 바로 그의 전사는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심암과 관계가 깊다. 그가 아군 백여명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적장을 생포할 때 전라좌수사는 꽁무니만 빼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과를 가로채려 하자 장군은 단호히 거절했다. 적은 다시 칩입해 왔다. 이때는 중과부적이어서 좌수사에게 긴급히 지원을 요쳥 했으나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전일의 일로 사감을 앞세운 때문이었다. 이것을 안 조정에서는 장군을 후임 좌수사에 임명코자 했으니 그때는 이미 돌아가신 때였다.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손죽도는 여수와 거문도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섬은 비록 작지만 한 가운데는 대촌을 이룬 가옥이 빼곡하고 여기서 사는 주민들은 평화롭게  반농 반어업에 종사하고 산다. 이 섬은 여수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첫 번째로 닿는 기항지면서 면소재지가 있는 거문도에서 볼 때는 한 면의 끄트머리에 해당한다. 가까이로는 소거문도와 평도, 광도가 있다.

나는 직장생활 초기에 이 섬을 담당했다. 전경대 순환근무를 마치고 첫번째 부임하여 담당한 곳이었다. 당시 나는 업무를 보려고 이 섬을 오가며 어렴풋이 이 섬이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장수의 묘가 있다고 들었고 그가 왜적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정년퇴임을 하고나서 고장에 거주하고 살면서 주변의 역사 유물을 찾아보다가 이대원 장군의 흔적을 더듬어 보게 되었다. 기록에 보면 장군은 18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21세에 녹도만호에 제수된 것으로 나온다. 지금의 행정구역은 여수시 삼산명이지만 옛날에는 흥양군(지금의 고흥군)에 속했다. 장군은 선조 때인 1587년 2월 10일 정해왜변이 일어나자 출동했다. 단번에 왜선  20여척를 물리치고 승리했다. 그런데 왜적은 패전 일주일 후 또다시 재침입을 해 왔다. 이때 장군은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붙잡혀서 죽임을 당했다. 그 주검은 처참했다.  왜적은 장군을  효수하여 깃대에다 내걸었던 것이다. 죽음 직전에 쓴 장군의 시가 한편 전해온다.

日暮轅門 渡海來 (일모원문 도해래)
兵孤勢乏 此生哀 (병고세핍 차생애)
君親思義 俱無報 (군친사의 구무보)
恨入愁雲結不開 (한입수운 결부개)
해저무는 진중에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
군사는 외로운 힘이 없어 죽으니 슬프도다
임금님과 부모님께 충효를 보답하지 못하니
한스러움과 먹구름이 얽혀 끝내 풀길이 없네.
 
바로 직전의 상황이다. 충무공 기록이 전하는 '진중일기'에 보면 이대원 장군은 왜구가 침입하자 출전했다. 두 번째 출전은 심수사가 지원군을 보내주지 않는 가운데 외롭게 나아갔다. 사실상 사지로 내몬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군은 이때 죽음을 예감했는지 손가락을 끊어서 옷에  절명시를 써서 하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오늘날 알려지고 있는 절명시다.

이 섬의 초기 지명은 장군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손대도(損大島)라 했는데 이것은 대장을 잃은 섬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나중에 순죽도로 바뀐 것이라 한다. 그 이후 윗선에 있던 사람으로 전라좌수사 심암뿐 아니라 전주부윤 남언경은 지원을 요청받고도 눈감아 버렸다고 한다.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한데 이 손죽도사건을 더듬어 보면서 강한 회의가 드는 것이 있다. 바로 이대원 장군이 전사한 후, 1590년에는 일본 풍신수길이 열도를 통일하고 전쟁기운이 감돌던 때인데 왜 그토록 방비를 소홀히 하고 지냈느냐는 하는 것이다. 더구나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의견이 각각 다르긴 했으나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일에는 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도대체 당파가 나라 보존하는 일보다 급하고 소중했을까.

손죽도 사건을 떠올리면 그 후로 이어진 조선의 역사가 영.정조 시대를 빼고는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음을 생각하면 임금의 무능과 위정자들의 안일무사가 얼마나 비극을 낳게 하는지를 엿보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손죽도는 내 한 개인의 추억이 어린 곳이면서 한편으로는 국가방위를 챙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뼈저리게 하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가만히 날개를 펴듯 대해에 떠있는 섬을 생각해 본다. 면적 3.10 평방키로미터에 세대수 150. 그리고 인구 747명이 오순도순 살고 있는 섬(1980기준). 손죽도는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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