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4 (일)
▲임병식 수필가
바닷물이 들고 나는 간석지는 하루 두 차례씩 꼬박꼬박 속살을 드러낸다. 보일 것 다 보이면서 보고 싶으면 다 보라는 듯이 하나도 감추지 않는다. 그런지라 물에 잠겨 보이지 않던 갯바위도 이때는 정체를 드러내어 실체를 보여준다. 그런 바위 위에는 낮에는 작열하는 햇살이 내려앉고 밤에는 교대로 달빛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바다가 맨몸을 드러내는 때면 바위에 달라붙어 있던 따개비들은 ' 이때다'하고 몸을 움크린다. 노출되어 다른 것에 먹히지 않도록 꼭 입을 다물어 버린다. 하나 반대로 게들에게는 이때가 활동 시기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 세상을 만난 듯 개펄 위를 헤적이며 다닌다.
나대는 건 녀석들 뿐만이 아니다. 달리기 선수인 갯강구 또한 무대가 좁다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오지랖 넓은 행동을 개시한다.
이들의 활동은 나중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갯고동이다. 이놈들은 미동 없는 듯해도 나중에 보면 온 바위에 체액을 발라 범벅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모래 위나 개펄 위를 기어 다니는 다른 놈들은 모래사장에 무수한 발자국을 찍어 놓는다. 그걸 보노라면 이놈들이 얼마나 자유분방하며 역동적으로 사는지를 알 수 있다.
갯강구는 몸이 어찌나 재빠른지 움직이는 걸 따로 추적하기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게는 그렇지 않다. 놈들을 보면 이만저만 주도면밀한 것이 아니다. 물이 빠져나가면 마치 해병이 잠수함의 해치를 열고 나오듯, 흙더미를 떠밀고 나왔다가 다시 밀물이 들어오면 쏜살같이 몸통을 숨기고는 입구를 흙으로 막아버린다.
그러면 감쪽같이 흔적은 감춰지고 밀물은 천연덕스럽게 그 위를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몽따고 뒤덮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금 전까지 펼쳐진 활동 흔적까지를 지워버리는 건 아니다.
엊그제 설 명절 때였다. 식구가 내외뿐인 우리 집은 늘 절간만 같았는데 근간에는 여러 친인척이 찾아와 머무는 통에 왁자했다. 그것이 싫지 않은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아내가 여간 흐뭇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차피 잠시 머물다 돌아가야 할 발길이기에 서둘러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 발길은 창문 한 번 열어서 공기를 환기시킬 때처럼 잠깐 신선한 변화를 선사하고 갔을 뿐이었다. 그런지라 뒤끝은 허전하고 예외 없이 일상으로 되돌려졌다.
하지만, 흐뭇한 인정은 훈김처럼 여운으로 남는다. 마치 간석지가 썰물에 드러났다가 다시 민물로 채워져도 그 흔적이 한동안 기억 속에 계속 어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