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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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식의 시 읽어 주는 남자키스ㅡ 구스타프 클림트 > 신병은 시인 귓불을 스친 그 바람이 수상하다모둠발로 엿보던 그 눈길이 수상하다허리춤 휘감아오던 그 손길이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와락 디밀고 들어온 그대 아니던가요그때 그대도 물길로 열렸을까요함께 출렁였을까요 아릿한 현기증이 수상하다식물성 풀벌레소리가 수상하다상큼 발랄한 바람의 화법이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마구 아찔한 유혹에 젖던 그대 아니던가요그때 그대도 꽃이었을까요함께 고요했을까요 적막하다고그립다고혼자말로 운을 떼었을 뿐인데불쑥 한발 침묵의 깊이로 디밀었던 당신그날, 온통 꽃이었지요 -제5회 한국문학인상 수상 작품- * 詩詩한 이야기 * >우동식시인 - 그 나름의 삶이 들어 있는 시와 그림 이 작품은 한국문인협회가 주관하는 올해 제5회 한국문학인상 수상 작품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라는 작품이 모티브가 되어 신선하고 발랄한 상상력과 함께 설렘과 그리움이 짙게 배여 나오는 시이다. 시인은 30년의 시 경력과 한국문단의 중견 문학인 일뿐 아니라 그동안 많은 미술 평론을 했고 이번에 <미술평론집>을 출판 할 정도로 미술평론에도 조예가 깊다.그림을 읽어 내는 시인의 눈빛은 그윽하고 깊으며 본질을 향한다. 예술행위라는 것이 위대한 창조 활동을 통해 결국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노력이라면 시와 일맥상통 한다. 미술 감상은 인간 읽기이고 인간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활동이다. 잭슨 폴록이 한 말처럼 ‘그림은 그 나름의 삶이 있다’ 클림트는 여자를 육체적 사랑과 플라토닉 사랑의 상대로 이분법적으로 대한 분열적인 사람이었다. 클림트의 여인 중 전자를 대표 하는 이가 치머만이고 후자를 대표하는 이가 에밀리 플뢰게였다고 한다. 이 그림 ‘키스’는 그의 운명의 연인인 에밀리 플뢰계라고 한다. 관능적인 여성 모티브와 유려한 선, 경멸을 담은 듯한, 무심한 듯한 표정을 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이고 기하학적인 장식 모티프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들은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관람객들을 매혹 시켰다. 클림트의 작품 키스는 꽃이 잔뜩 핀 벼랑위에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있다. 그 바람, 그 눈길, 그 손길이 수상하다. 남자는 여자의 뺨에 입맞춤을 하고 여자는 그 감흥에 몰입해 있다, 고 생각하는 순간, 와락 디밀고 와 물길이 열렸고 출렁거렸다. 여자의 손가락이 말려들어 가는 모습에 그 감흥의 정도를 짐작 할 수 있다. 짜릿하고 달콤한 첫 키스를 경험하는 황홀한 순간 현기증이 일고 풀벌레소리가 자지르지게 들렸고 바람의 교태로 읽혔다. 고 생각하는 순간, 아찔한 유혹과 침묵의 깊이로 불쑥 꽃이 피었다. 클림트의 벼랑 위의 사랑이 황금 꽃밭이요. 꽃으로 피어난다. 직사각형 패턴의 남성성의 의상도 원형패턴의 여성성의 의상도 금빛 찬란한 하나로 화해되어 경계나 구별이 사라지고 단단하게 결합 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 시에서 ‘그날’ 이라는 한 단어가 그림과 시, 상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 가 만나는 교묘한 지점이다.분해와 해체 그리고 아슬아슬한 설레임으로 재구성한 신(神)적 경지의 작품으로 보인다. 클림트의 그림 해석을 통해 시를 창작하고 있고 시를 통해 새로운 그림을 형상화하고 있다.클림트는 플라토닉의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이 그림에 담았고 그 그림을 확장하고 상상력을 더해 이 시는 표현 해 주고 있다. 상상력을 잘 다스려서 기묘한 것을 만나게 되면 그 정신은 사물과 함께 노닐게 되는 모습이다. 그 앞에서 경계는 무장 해제 되고 풀리게 되며 온통 꽃으로 피어날 뿐이다. ‘숨이 홀딱 넘어 갈 뻔한 키스’가 그립다. 우동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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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식의 <시 읽어 주는 남자>우동식의 <시 읽어 주는 남자> 하선(下船) 이성배 밥은 묵었나 내사 요새 통 밥맛을 모르겄다 아이가 담배 하나 도그래도 담배 맛은 안변하니 쪼개이 더 살것제사람이 희안하제 바다 우에서는 그리도 바다가 실터마는 바다 내음 못 맡으니 답답해 미치겄다 그래 우짜노 요래 쪼그리고 썩은 갯냄이라도 맡아야지 한 세상 잠깐 인기라 열여덟에 첫 배 탔으니 벌써 오십년이 지났따 아이가그때가 좋았는기라 전부 손으로 해서 심은 들었찌마는 앞 바다만 나가도 맹태가 천지삐까린기라 한 배 잔뜩 풀어 놓으면 그기 다 돈이였제여편네 주고도 한 매칠 방석집 가서나들 궁디는 두드릴 수 있었다 아이가 그라다가 그 맹태 쪼차서 북양까지 안갔더냐 니 산만한 파도 못봤제 바다가 벌떡 일어나 산처럼 덮치는 기라 파도가 몸에 묻으몬 그대로 칼이 박히는기라물에 살갗이 찢어지는 기라 말도마라 죽을 고비 수없이 넘겨따 아이가 죽은 사람 쌔삤다 아이가 어이구 우째 그 일을 했는지 인자는 천만금 준다캐도 못할끼라 못난 서방 파도 우에 띄워놓고 간 졸이다 그기 병이 되가꼬 마누라 일찍 안갔나 자슥들 다 소용없는 기라 지 잘나서 큰 줄 알제 오데 애비 에미 고생 모른다카이 한 세상이 배 위 인기라 사는 기 파도 우에 미끄럼인기라 내는 고기를 쫓고 또 태풍은 나를 쪼차오고 죽을 똥 살 똥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니벌써 여기 아이가 참말로 잠깐이제 잠깐 인기라 이제 고마 내도 세상에서 내릴 때가 된기제항구가 바로 코 앞이제 담배 하나 더 도고 <詩詩한 이야기 > "삶이 시가 되고 시가 삶이 되는 순간....." 우동식(시인)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있는 경상도 한 사내가 보인다. 경상도 구수한 사투리로 담배 연기처럼 한 모금씩 풀어놓는 그 이야기보따리는 술술 풀리지만 그 내용과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그 옆에서 열심히 그 이야기를 받아 적고 있는 또 한 사람, 시인이 보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지난날이 오버랩 되면서 일생을 되돌아보는 화자의 독백을 그대로 필사 하듯 받아 적는다. 삶이 시가 되고 시가 삶이 되는 순간이다. 이 시를 보면 누구나 시인이며 누구나 시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뒤돌아보면 모두가 시요. 시적인 삶이고 또 삶은 곧 시문이다. 왜 시인은 ‘담배 하나 도’ 로 시작하여 ‘담배 하나 더 도고’로 시문을 매듭지었을까? 인생이라는 게 담배 한 개비 피우는 사이, 담배 한 개비의 연기가 사라지는 순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참말로 잠깐이제 잠깐 인기라’ ‘한 세상이 배 위 인기라 ’ ‘사는 기 파도 우에 미끄럼인기라’ “나 두야 간다 /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거냐 / 나두야 가련다” -떠나가는 배 중략, 박용철박용철시인은 일제 강점기, 내일을 기약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래도 미래지향적인 의지를 지니고 ‘나두야 가련다, 라고 인생을 배에 비유하고 있다. “칼로 물을 베니 물은 계속 흐르기만 하고, 술로 근심을 달래니, 근심은 더욱 깊어만 가네,인생어디 뜻대로 되는 게 있으랴, 훌훌 벗어던지고 홀몸 일엽편주에 맡겨보리라” 이백시인의 고백처럼 망망대해에 일엽편주(一葉片舟)로 떠 있는 배가 인생 일 뿐이다. ‘바다가 벌떡 일어나 산처럼 덮치는 기라/ 파도가 몸에 묻으몬 그대로 칼이 박히는기라/물에 살갗이 찢어지는 기라/ 말도마라 죽을 고비 수없이 넘겨따 아이가’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인생의 배를 띄워놓고 일생을 항해 하다가 항구에 닿는 것이 하선(下船)의 순간이다. ‘이제 고마 내도 세상에서 내릴 때가 된기제 항구가 바로 코 앞이제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해 아래 수고한 모든 수고가 무슨 유익이 있는고 다 바람을 잡는 것 같다는 잠언 솔로몬의 고백이 들린다. 유안진의 ’바람의 아들 ‘이고 서정주의 나를 만드는 자화상의 ’팔 할이 바람‘일 뿐이다. 당신의 배는 어디쯤 항해 하고 있는가? 당신의 배는 안전 한가? 서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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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자연이다 6 _ 돌산갓 산업화는 고품질 돌산갓 재배로부터 시작되어야돌산갓 산업화는 고품질 돌산갓 재배로부터 시작되어야 돌산갓김치는 독특한 향과 맛 때문에 여수 대표 음식물 중 으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독특한 알싸한 매운맛에 돌산갓김치 애호가가 생길 정도로 돌산갓김치는 이제 여수를 벗어나 전국적인 대표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수시에서는 돌산갓김치뿐만 아니라 돌산갓 종자개발, 돌산갓 물김치, 돌산갓 파이, 돌산갓 장아찌, 돌산갓 쌈채 등을 개발하여 돌산갓에 대한 산업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가공 기술이 뛰어나더라도 원재료인 작물의 품질이 좋지 않으면 최종 제품의 품질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달리 말하면 돌산갓김치 품질은 양념류나 가공 기술 이전에 농민들이 밭에서 돌산갓을 어떻게 길러내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돌산갓 산업화의 시초는 고품질 돌산갓 재배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그 근본은 토양과 재배방법에 달려 있다. 필자가 고품질 돌산갓 생산을 위해 10여 년전 돌산지역 토양을 도로변, 해안지대, 산지, 평야지 밭에서 채취하여 분석한 결과 각 지역별 토양 성분 분석값이 너무 다르게 나왔다. 예를들어 산지의 토양 pH는 약 4.8 정도이었지만 평야지 토양 pH는 7.7 정도이어서 편차가 심하였고 토양내 칼슘이온이나 마그네슘 이온 함량도 서로 달랐다. 갓(Brassica juncea Czerniak et Coss)은 십자화과에 속하는 경엽 채소류로 중앙아시아 지역이 원산지이며 유기물이 풍부하고 토심이 깊으며 토양 산도가 6.0~6.8 정도에 잘 자란다. 따라서 pH가 낮은 산지토양은 석회질비료를 시비하여야 하고 pH가 높은 평야지 토양은 더 이상 석회질비료를 시비하여서는 안된다. 돌산갓김치 제조업체를 조사한 결과 돌산갓김치 제조시 돌산갓 생체 문제에 대해 서로 인식하고 있었는 데 주요 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옛날 맛이 나지 않는다. 둘째는 저장 기간이 짧다. 셋째는 수분이 너무 많다” 이었다. 이런 갓을 농민들은 물갓이라고 하였다. 또한 희망하는 돌산갓 생체 품질 관리 목표를 물었더니 “독특한 향이 있고 키가 짧으면서 줄기는 두껍게” 라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현재 돌산갓 재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문제 해결은 간단하다. 농민들이 수십년 동안 답습하고 있는 토양관리와 재배방법을 달리하는 데 있다. 돌산갓이 옛날 맛이 나지 않고 저장 기간이 짧고 수분이 너무 많은 것은 하늘과 관련 있다. 즉 충분한 햇빛을 받지 못하여 제대로 커지 못하고 너무리 웃자라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 빨리 키우기 위해 스프링클러로 물을 급수하고 요소비료를 살포함으로써 돌산갓은 급속도로 연약하게 자란다. 또한 돌산갓 씨앗을 밭에 직접 파종함으로써 모가 빽빽하게 나고 아무리 잘 솎아낸다하더라도 갓은 밭에서 빽빽하게 자란다.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한 갓은 연약하게 자라기 때문에 병해충 피해도 많을 수 밖에 없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씨앗 파종을 밭에 직접하지 않고 돌산갓 씨앗을 상토가 충진된 포트에 넣고 20여일 동안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뒤 밭에서 배추 심듯이 일정 간격으로 심었다. 또한 칼슘, 마그네슘, 유황 및 미량요소가 들어 있는 토양 영양제를 돌산갓 심기 전에 밭토양에 넣어주고 깊게 갈아주어 돌산갓 품질을 좋게하였다. 그 결과 놀랍게도 돌산갓은 방해요소 없이 햇빛을 충분히 받아 뿌리는 배추뿌리처럼 곧게 내려갔고 잎은 배추잎처럼 넓게 자라게 되었다. “독특한 향이 있고 키가 짧으면서 줄기는 두껍게” 라는 품질 목표가 단번에 해결되었다. 돌산갓 재배방법 이외 토양 영양 성분으로 돌산갓 품질을 올릴 수 있는 방안은 다음과 같다. 돌산갓에는 시니그린(sinigrin)이라는 성분이 있다. 돌산갓김치를 먹을 때 입안에서 톡쏘는 매운맛을 내는 성분이다. 이 시니그린(sinigrin) 성분 안에는 유황 성분이 두 분자나 들어 있어 유황 성분이 적으면 독특한 향이 적어진다. 갓이 물러지는 현상은 식물 세포벽과 관련있다. 칼슘은 식물 세포벽 구성 성분으로 식물체의 골격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여 돌산갓 생체에 칼슘성분이 부족하면 쉽게 세포가 파괴되어 돌산갓 안에 있던 수분이 바깥으로 빠져나오게 된다. 마그네슘은 식물의 광합성과 관련있는 엽록소 구성성분으로 마그네슘이 부족하면 충분한 광합성을 하지 못하게 되어 돌산갓의 품질이 떨어지게 된다. 특히 돌산갓은 엽채이기 때문에 마그네슘을 충분히 공급해주어야 한다. 붕소는 배추, 무, 브로콜리, 겨자, 갓, 청경채 등과 같은 십자화과 작물에는 부족하기 쉬운 성분으로 만약 부족시 줄기의 생장점이 붕괴되고 유관속이 파괴되며 뿌리의 생장이 극도로 나빠지고 갈변한다. 하지만 붕소는 미량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많이 시용하면 안된다. 이런 성분 이외에도 많은 종류의 영양소를 골고루 뿌려주어야 한다. 어떤 성분이 좋다고 하여 과잉으로 뿌리면 문제가 발생된다. 또한 현 질소, 인산, 칼리 3요소 비료 시비에서 탈피하고 토양 검증을 통한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해주고 남아도는 영양소는 적게 주어 토양 내 영양소의 발란스를 잘 유지해주어야 고품질 돌산갓 생산이 가능하다. 하병연 이학박사, 시인국립경상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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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탐방> - 거문도 회상-나를 그립게 만드는 섬 임병식 수필가 나는 거문도를 생각하면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그대가 ?옆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는 말. 이 말을 생각하면 얼마나 그리움이 사무치는 것인가. 거문도는 정말이지 나를 그립게 만드는 섬이 아닌가 한다. 아름다운 풍광 못지않게 늘 그리움과 안타까움과 환희와 절망이 함께 뒤엉켜 혼재 하는 인상 때문일까. 거문도는 육지로 부터 무려 134.7km나 떨어져 있는 섬이다. 형상은 세 개의 섬이 마치 소쿠리 형태로 어깨동무를 하듯이 감싸고 있다. 그런지라 제아무리 풍파가 거세도 끄떡없는 천혜의 포구를 자랑한다. 이 섬은 조업하는 선박들의 대피장소이면서 선원들의 휴식처이다. 풍랑주의보나 태풍경보가 내리면 국내 선박뿐 아니라 인근을 지나는 타국적의 배들이 예외 없이 몰려든다. 섬의 모양은 본도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섬이 무려 33개나 아우러져 있다. 그런 만큼 바다에 떠있는 진주와도 같은 풍광을 자랑한다.통상 섬은 한자로 도서(島嶼)로 표기한다. 도(島)도 섬도자이고, 서(嶼)도 섬서자이니 각각 따로 부를 법도 하지만 외자로 떼어서 부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옛 문헌에 보면 ‘도’와 ‘서’는 엄연히 다르게 나와 있다. 즉, 도(島)는 해중유릉가거(海中有陵可居)라 하여 사람이 사는 것을 일컫고, 서(嶼)는 재수위(在水爲) 혹은 (재릉위(在陵爲)라고 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이른다. 아무튼 이 외딴 섬 거문도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세게 열강의 입김에 시달려왔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근대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맞서 영국군이 진주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거문도는 그 지명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은 19세기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이 섬에 와서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음을 보고 ‘문장가가 많다’는 뜻으로 <巨文>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섬은 또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다. 영국군은 23개월여를 주둔하면서 포트 헤밀턴( PORT HANILTON) 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 흔적을 남겼다. 이때 죽은 병사를 이곳에 묻고 묘비를 세웠다. 이 섬에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설치된 유물이 하나 더 남아 있다. 뭐냐하면 서도 수월산에 있는 등대로 1905년에 세워진 것이다. 이 등대는 우리나라 등대역사로 볼 때 인천 팔미도 등대에 이어 두 번 째로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세운 목적은 일제가 배를 이용해 수탈할 목적으로 방향잡이용으로 세운 것이다. 이렇듯 거문도는 우리의 영토이면서도 늘 외떨어져 있어 외세에 시달려온 아픈 역사를 간직한 것이다. 나는 1971년 발령을 받아 이 섬에 부임했다. 그런데 부임하고 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구사하는 사투리는 물론 생활의 패턴이 내가 자란 곳과 많이 달랐다. 밀물과 썰물, 조금과 시라, 여객선 입항과 출항에 따라 모든 생활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의 행동은 일사불란하기만 했다.한데도,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마주친 풍광이 아름다워서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꺼풀 속살을 비집고 들어가면 침략의 흔적이 오롯이 나타났다. 다음은 그런 느낌을 받고 써본 자작시이다. 거문도에 가면 외세가 훓고간 바람이 분다.1905년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등대,누가 불러들이지도 않았는데도 군인들이 몰려와 숨져간 흔적이 남아 있다그리고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백도는 지금도 그 상처에 자지러져 아파 한다 하지만 나중의 이런 마음과는 달리 처음 대해본 거문도의 비경은 실로 일품이었다. 마치 풍광이 그림 같고 드러내는 모습들은 이국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첫날부터 혹독한 신고식은 치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타고오던 삼산호가 어찌나 거친 파도에 요동을 치든지 반 주검이 되고 말았었다. 손죽도와 초도사이는 예로부터 악명이 높아 극심한 삼각파도가 배전을 강타라도 하면 좌우상하로 흔들려서 생지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바람에 승객들은 체면불고하고 서로 뒤엉켜 비명을 지르지 나뒹굴어 졌다. 그러니 한 마디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거문도에 도착하니 언제 그랬느냐 싶게 바람은 잦아들고 파도는 잔잔했다. 다만 항내에 가득 찬 선박들만이 태풍의 전조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발이 묶인 배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서 도선을 이용하지 않고도 이웃 섬을 건너뛰어 갈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거문도에 와서 진정으로 절경을 실감한 건 백도이다. 관광객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에 나는 그곳을 둘러볼 기회를 얻었었다. 그 황홀한 아름다운 절경이라니... 그 감동은 이어지는 후반부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꼭꼭 싸매서 숨겨둔 섬백도는 범접하기 어려운 신이 노니는 섬.그 기기묘묘한 수직절리 타고 오를 자는진정 없으리. 한데 그때가 언제인가 . 내가 거문도에서 새 출발의 첫발을 내디 딘 지도 벌써 수 십 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모습도 많이 변했다.삼도로 나뉘어 있던 섬은 다리가 놓여 연결되었고, 옛 등대는 수명을 다하고 유물로 남겨졌다. 그리고 백도에는 찾아오는 관람객으로 넘쳐난다. 하지만 나는 거문도를 떠올리면 조금은 아쉬움이 있다. 도로를 낸답시고 옛 소롯길을 훼손하고 말았는데, 그 바람에 옛길이 사라져 버려서다. 예전의 그 길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덕촌에서 변촌을 지나 서도로 이어지는 그 아름다운 벼룻길은 너무나 아름다워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픔을 모르게 만들었다. 그 아름다운 숲길, 수줍게 피어난 동백꽃이 이마에 나직하게 닿던 정겨움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안타까움에 오랜 세월 지났지만 '아, 옛날이여'하는 아쉬운 생각이 절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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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현 미용장의 <머리카락 이야기>-6붙임머리로 획기적인 변신 >변신 전 >변신 후 흩날리는 긴 머리에 대한 로망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었을 것이다. 가끔 머리카락을 빨리 자라게 하는 샴푸가 있는지 문의하는 고객을 만날 수 있다. 밥만 먹으면 자라는 게 머리카락이란 말을 하지만 실상 머리카락이 잘 자라지 않는 고객을 만나기도 한다. 손상이 심해서 끊기는 머리카락이 있고 머리카락 자체가 약해서 잘 자라지 않기도 하고 곱슬기가 많아서 머리카락이 자라기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분들도 계신다. 붙임머리에는 링으로 하는 기법, 땋기, 꼬기, 실리콘 등 다양한 기법이 있지만, 요즈음은 가벼운 땋기나 꼬기 기법으로 많이 하는 편이다. 획기적인 이미지 변신이라는 서프라이즈와 인모로 된 피스는 처음엔 굉장히 머릿결이 좋아서 관리만 잘하면 두세 달 넘게 유지가 되는 장점이 있고 내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붙여져 있어서 샴푸 할 때나 잠잘 때 불편함과 간혹 붙임머리랑 함께 머리카락이 끊기는 단점도 있기에 단점을 감당하면서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싶다면 한 번쯤 도전 해볼 만 하다. 이번에 붙임머리를 한 고객님의 사례를 보면 숱이 많고 곱슬기가 많아서 머리카락을 기르지 못하시다가 꼭 한번은 긴 머리를 해보고 싶으셔서 땋기 기법으로 머리카락을 붙이게 되었다. 인모 피스는 펌과 염색이 가능하지만 좋은 머릿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될 수 있으면 안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곱슬머리인 고객의 머릿결을 따라 매일 드라이 해야 하는 불편함을 호소하여 부득이 펌을 해드렸다. 송정현 미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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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탐방>-임병식수필가고락산성(鼓樂山城) 답사기 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는 유서깊은 고성(古城)이 하나 있다. 고락산성(鼓樂山城)으로 백제시대에 축성된 성이다. 이것이 한동안은 거의 다 허물어져 방치상태에 있었다. 내가 처음 그것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지금으로부터 40년도 훨씬 전이다. 그때 산에 올라 보니 산성은 폐성(廢城)밑돌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었다. 겨우 그것이 산성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러다가 20여년 후 다시 오르니 이때는 산성을 잘 정비하여 원형의 모습을 갖춰놓고 있었다. 보는 순간 반가웠다. 잊힐 뻔 한 역사를 복원해 놓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몰랐다. 사실 이 고락산성은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주변에서는 가장 오래된 성이면서 중요한 방어진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특별한 전투기록은 없지만 인근 순천 왜성에서 고니시가 머물고 있을 때 검단산성에서 조명연합군이 대치하고 중국 진린 제독은 묘도 도독골에서, 이순신 장군은 율촌 장도에서 전투를 벌일 때, 이 성은 분명 후방 척후의 구실을 했을 것이다. 이 성은 2010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둘레는 354m, 보루의 둘레도 244m에 이른다. 성의 형태는 남쪽은 좁고 북쪽은 상대적으로 넓다. 나는 처음 허물어진 이 성을 보면서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떠올렸다. 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부역에 시달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데, 부역이라는 말은 지극히 조심해서 쓸 필요가 있다. 여기서 언급한 것은 부역(負役)인데, 이 말이 반역에 가담하는 부역(附逆)과 말이 같기 때문이다. 이 성은 높이로 따지면 해발 400미터 정도가 되나 매우 가팔라서 맨몸으로도 오르기가 숨이 찬다. 그런데 이런 곳까지 무거운 돌을 등에 지거나 밧줄로 끌어 올렸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나중에 산에 오른 나는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근자에 쌓은 것과 옛 돌은 차이가 났다. 옛날 놓인 바위는 고색이 창연했다. 그 밑돌을 보노라니 옛분들의 노역의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보기에 위험하기도 하려니와 큰 돌을 끌어 올릴 때는 무척 힘도 들었을 것 같다. 당시는 무슨 노임을 받은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가 집에서 먹을 것을 챙겨와 부역을 했을 것이다.이곳 성의 규모로 보아 병력은 적게 잡아도 수백 명, 중대병력이상을 수용했을 것 같다. 나는 성을 둘러보다가 어느 분이 쓴 들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여수에 출신 정종선(丁鐘璿 1811-1878)이란 선비가 올린 상소문이다. 그 상소문 중에는 당시 여수가 순천에 병합됨에 따라 얼마나 과도하게 세금과 부역을 부담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시 속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한 상소문인 것이다.이때는 어느 시기인가. 대략 순조 연간으로 그때는 거의 외침도 없던 때인데도 고을 백성들은 과도하게 부역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힘 있는 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고 힘없는 백성만이 온전히 과도한 부역을 떠맡고 있었다. 형편이 그 모양이니 나라의 기강이 온전히 바로 서겠는가. 그런 일단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쓴 <적성촌의 한 집을 지나며>라는 시를 보면 정황이 그려진다. 시의 일부다. (전략) 아침 점심 다 굶다가 밤에 와서 밥을 짓고/ 여름에는 갈옷 입고 겨울에는 베옷 입네/ 들 냉이 깊은 싹은 땅 녹기를 기다리고,/ 이웃집 술 익어야 지게미라도 얻어 먹겠네/ 지난 봄에 꾸어 먹은 환곡이 닷 말인데/ 이 때문에 금년은 정말 못살겠네(이하 생략) 피폐한 생활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다음은 정종선 선비의 상소문 일부이다. "(전략) 부역에 있어서 여수 백성들은 전라좌수영의 부역에다 순천 부역까지 나가니 한 몸으로 두 곳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한 집에 사오 명의 가족이 있다면 아버지는 수영의 부역에 나가고 아들은 순천 부역에 나가며 형은 수영 부역, 동생은 순천 부역에 나가야 하는데 그것도 어느 때에는 아침에는 수영 부역, 낮에는 순천 부역에 나가는 때가 있으니 한 몸에 두 지게를 져야 하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거리입니다.(이하생략)" 당시의 부역은 살아가는데도 힘든 마당이어서 지옥과 같았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 지역민들은 배를 부릴 줄 안다는 이유로 노 젓는 노역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동원이 되었을 테니 얼마나 고초가 많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석성을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부역에 시달린 민초들은 이 성을 쌓으며 나중 누가 기억해 주리라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성에 올라 지금은 한줌 흙과 바람으로 흝어진 그들의 영혼을 떠올리자니 그 흔적을 더듬는 일이 야릇하기만 하다. 이날 나는 이 고달픈 부역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그분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그 흔적을 기억하겠다는 는 의미로 조그만 돌 하나를성위에 놓아두고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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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현 미용장의 <머리카락 이야기>-4가발도 패션이다 -송정현 미용장 숱이 많은 머리카락은 이미지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나이보다 어려보이고 세련되게 보인다. 세월의 완숙미 넘치는 중년이 되는 것이라지만 자꾸만 벗겨지는 주변머리나 속알머리를 보면 속상하지 아니할 수 없다. 머리숱이 적은 고민은 비단 남성 고객뿐만 아니라 여성고객 역시 마찬가지다. 간혹 여성고객이 안 어울리는 긴 생머리를 남편이 자꾸 하라고 한다며 어쩔줄 몰라 할 때가 있다. 물론 본인도 어릴 때처럼 긴 생머리가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고 싶을 것이다. 머리카락은 얇고 가늘어져 볼륨감은 없고 얼굴에 탄력은 떨어지고 주름도 늘어나서 긴 생머리를 하면 더없이 초라해 보이니 어쩌란 말인가! 가끔 그나마 긴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중년의 멋진 여성분들도 계신다. 그런분들 역시 2% 부족함을 호소한다. 그럴 때 머리위에 가발을 살짝 올려놓으면 신기하게도 몇 살은 더 어려보이는 효과가 있다. 가발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원전 323년, 클레오파트라를 만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시리아로 쫒아낸 클레오파트라를 카이사르가 이집트로 불렀을 때 탐스런 흑갈색 머릿결과 빛나는 황금색 화장으로 꾸민 눈부신 아름다움에 한눈에 반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에게 왕권을 되찾아 주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일당을 물리치고 기원전 51년 7번째의 여왕으로 클레오파트라를 등극시킨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상류층에서만 가발을 사용하였다. 만약 클레오파트라가 빈모였다면 어땠을까? 과연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첫눈에 반했을까? 반하지 않았다면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 탐스런 머릿결에 대한 찬미讚美를 해본다. 잦은 염색을 해야 하거나 머리카락이 가늘고 얇아 가라앉거나 빈모라면 나에게 어울리는 가발 몇 개로 옷처럼 갈아입듯 멋을 부려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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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광의 해양바라기>여수시도, 양식업자도, 시민도, 신경 쓰지 않는 소호 디오션 앞 갯가 쓰레기 서남해환경센터 회원들과 해양 정화 활동하는 날이다.디오션 앞 갯가, 멀리 까지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다. 다른 날 같으면 생수 페트병부터 비닐봉지, 각종 플라스틱 범벅인데 이날은 유독 폐스티로폼이 많다. 대부분 양식장에서 나온 폐스티로폼 덩어리와 오래 되어서 작게 부서진 조각들이다. 부피 큰 폐스티로폼을 한 곳에 쌓아올리면 다른 회원이 나르고, 작은 플라스틱과 비닐 조각을 주웠다. 모래와 자갈 속에 옥수수 알갱이 보다 작은 스티로폼 조각들이 속속들이 박혀있다. 파도 한 방이면 바다로 쓸려 갈 운명들이다. 지난 번 쌓아놓고 갔던 쓰레기 마대가 한쪽 구석에 그대로 처박혀있다. 쓰레기 중에 제일 고약한 놈은 박혀있는 줄이다. 양식장에서 사용했던 원기둥 모양의 폐스티로폼은 굵은 나이론 밧줄에 끼워져 땅속이나 바위 사이에 박혀있다. 이런 줄들은 잡아끌어도 꼼짝달싹하지 않는다. 낫으로 밧줄을 내리치며 줄을 끊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쌓아올린 폐스티로폼이 작은 산을 만들었다. 환경과 관계된 것일까? 얼마전 꼬마물떼새가 알을 낳았다는데 평소 산란기 보다 빠르다. 정화활동하며 알을 밟을까봐 내내 조심스러웠는데, 회원 중에 신경질적인 어미 물떼새의 소리를 들었다고도 한다. 우리는 환경 생태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호미와 낫으로 밧줄을 잘라가며 양식장 폐스티로폼을 떼어냈다. 한해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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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식의 <詩 읽어주는 남자>우동식의 <詩 읽어주는 남자> 바람의 이유 박혜연 내 안에서 바람이 풀려 나왔지너는 그 바람을 잡고 내게로 왔다 풀리는 것들은 부드럽고 강하다 햇살이 풀려서 나무가 자라고 바다가 풀려서 섬이 자라고 내가 풀려서 네가 자란다 나는 풀리는 혀로 너를 핥는다 나는 풀리는 눈으로 너를 읽는다 나는 풀리는 귀로 너를 듣는다 너는 풀리면서 꽃으로 피고 너는 풀리면서 수평선 별로 뜨고 너는 풀리면서 사랑을 한다 네 속에 바람이 불 때 그 바람을 잡고 내게로 돌아온다 바람은 바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서 불어오는 것이다 내 속에서 네가 돌아오듯이 네 속에서 내가 돌아온다 ///詩詩한 이야기/// 풀리는 것은 강하다. ...그리고 그 바람은, 네게서 내게서 온다. 사물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이미지의 형상화 작업은 그 사물의 깊은 곳을 살펴보고 난 뒤에라야 가능한일이다. 그 사물과 거리를 두고 오랫동안 머물면서 내면을 들여다보고 밑바닥까지 구석구석을 보아야 하고 그 사물의 모든 것을 살펴야 한다. 사물의 내면을 치밀하게 살필 때 좋은 시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의 의미를 통찰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사물을 깊이 응시하는 시선과 교감을 통한 사유에서 온다. 박혜연 시인은 현재 (사)한국문인협회 여수지부장이다 그의 첫 시집 【붉은 활주로】 에 실려 있는 <바람의 이유>는 응시와 사유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바람의 속성과 실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바람의 혀를 보았고 바람의 눈을 보았고 바람의 귀를 보았다. 그리고 그 바람이 되어 바람의 풀리는 혀로 핥았고 바람의 풀리는 눈으로 읽었고 바람의 풀리는 귀로 들었다. 그 바람은 다분히 풀리는 바람으로서 자유로운 영혼이다. 생명을 불어넣는 바람이다.이 바람 속에는 우주를 향하는 길이 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보인다. 시인은 바람과 소통하면서 사유의 폭을 확장하고 있으며 내면의 깊은 의미를 성찰하는 기회로 삼는다. 싱그러운 봄 날 생명이 약동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풀리는 것은 강하다. 그리고 그 바람은 바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네게서 내게서 온다. 그 바람은 희망(希)이고 욕망(欲)이고 바람(風)이다.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다. 인생의 80%는 바람 때문에 산다는 것이다. 강한 바람 센바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풀리는 바람이 있다, 봄 바람이 있다. 풀리면서 꽃은 피고 풀리면서 수평선 별은 뜨고 풀리면서 사랑을 한다. 내 안에서 바람이 풀려 나온다. 우동식 <시인, 낭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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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현 미용장의 <머리카락 이야기> - 3버려지는 머리카락 재 탄생, 코사지만들기 송정현 미용장 버려질 머리카락이 꽃으로 피는 순간, 쓰레기에서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이 있다.머리카락을 만지고 빗는 것을 뛰어넘어 머리카락이 꽃으로 점점 변해가는 과정을 소개하겠다. 1.까만 머리카락을 탈색 하고 빨강, 노랑 등의 원하는 색을 입힌다. 2.꽃잎을 만들기 위해 풀칠을 한다.3.꽃잎 모양으로 오려내어 꽃잎 하나 하나를 붙여서 입체적으로 꽃을 만든다. 4.만들어진 꽃을 이용하여 코사지를 탄생시키고 헤어핀을 탄생시킨다. 버려지는 머리카락으로 하나의 코사지와 헤어핀을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힘이 소요 된다.고객의 머리를 만지는 것도 예술이다. 개성적인 자기표현을 위해 이미지 변신을 하는 컬러 체인지, 직선의 머리카락에 펌을 해서 곡선을 만들어 내는 것, 곱슬머리를 곧게 펴주는 것, 땋기나 꼬기 등을 이용해 화려하게 올린 업스타일 등이 그렇고 특히 작품 위주로 하는 헤어바이나이트, 크리에이티브, 데이스타일 등에서 느끼는 살아있는 율동감이나 아름다움은 뛰어난 창작성을 보인다. 수많은 머리카락을 빗질하여 공작의 날개같이 펼쳐 각양각색의 색깔을 물들인 머리카락이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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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식의 <시 읽어주는 남자 >우동식의 <시 읽어주는 남자 > 목련쇼 우동식 전화가 왔다 잘사냐? 목련꽃이 피었는데 하늘궁궐 모델쇼 같다야 합장한 도도한 시선 캣워크 런어웨이 나무 끝에서 읽는 강렬한 시 그림 꽃부터 피는 지붕 한 채의 몰입 몇 초간의 사랑 후 확 저버리는 꽃불 의식을 치른 후 슬럼프를 생각하는데 또 전화 한통이 왔다 친구야 목련꽃이 다 지는데 똥 닦은 휴지 같다야 백목련 우동식 저 참한 여인네는 왜 소복을 반쯤 벗고 속치마를 휘날리고 난리야 근데 저 햇살은 왜 자꾸 몸을 더듬고 열을 올리고 지랄이야 저 바람은 왜 또 하얀 저고리를 치켜들어 올리고 자빠졌나 바람 난 봄이 미쳤나 나는 왜 또 몸이 근질근질 지랄옘병 이야 천형이야 -----詩詩한 이야기 손을 모아 기도하는 듯 소복소복 담았다가, 하얀 꽃잎을 활짝 펼치는.... 여수시 상암동에는 진달래 군락지인 명산 영취산이 있고 그 아래는 상암초등학교 교정과 상암교회가 나란히 앉아있다. 필자는 그 근처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상암교회 앞뜰에 있는 목련 나무에서 봉긋하게 기도하는 손 같은 꽃봉오리가 솟는 것을 몇 일전 보았다. 몇 년 전에 그 자리에서 너무나 목련꽃이 탐스럽고 예뻐서 심취하였다가 쓴 시가< 목련쇼>이다. 순백의 탐스러운 자태와 우아하고 귀족적이며 고고하면서도 경건하게 손을 모아 기도하는 듯 소복소복 담았다가 손을 열면서 하얀 꽃잎을 활짝 펼치는 것이 얼마나 건사한지 교회 종탑 십자가와 어울러져 경건하기까지 했다. 하늘궁궐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모델들이 모델쇼를 하는 것 같았다. 그 모델쇼는 도도했고 강렬했으며 꽃불로 타오르는 듯 뜨거웠다. 어떤 의식보다도 몰입이 되었다, 나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서 그 의식을 담았고 멀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퍼 날랐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교회앞마당 뜰에 깔려 있는 목련꽃들을 보게 되었다. 누렇게 변모되고 구겨진 모습들이 ‘똥 닦은 휴지’같았다,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이라 했지만 전화 한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화려함도 아름다움도 고고하고 품격 있는 꽃도 떨어져 버리는 것처럼 인생이 바로 그런 게 아닌 가 반추 해 보는 계기가 된다, 또 다른 한편의 시 역시, 교회 앞에 있는 상암초등학교 운동장 언저리에 있는 <백목련>을 보면서 적은 것이다. 이곳의 목련은 다른 목련이 다 지고 나면 늦게 서야 피고는 어느 목련보다 허느적 거리는 것 같다. 학교 교장선생님은 그 목련을 한참이나 검색하시더니 백목련이라 하셨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오후, 운동장 곁 팔각정에서 교장선생님과 목련차를 나누어 마시면서 고목 같은 목련나무 곁가지에서 흐드러지게 핀 목련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마치 하얀 소복을 입은 참한 여인네로 보였다. 그 여인은 속치마를 흩날리고, 햇살은 몸을 더듬거리고, 바람은 자꾸 하얀 저고리를 치켜 올리고 지랄 난리다. 봄바람이 분다. 지랄옘병 몸이 근질근질하다 천형이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추운 겨울을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는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봄비 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 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우리 따슷한 기억들 언제까지나 내 사랑이어라 내 사랑이어라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 아픈 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 ” 우리는 하노이 정상회담을 통하여 세계평화의 진정한 봄을 기대 했다. 그러나 봄은 왔지만 아직 봄은 아니다. 아픈 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지고 떠난 봄처럼 다시 봄은 오고 내 사랑 목련은 시대의 선구자로 피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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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자연이다>-2호미질은 왜 좋은가? > 경상대학교 학술연구교수 하병연 -작물 뿌리도 사람처럼 산소를 호흡한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젖는다”. 주병선 가수의 칠갑산 노래가사이다. 베적삼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콩밭 매는 풍경을 노래한 것인데 왜 이토록 힘든 노동을 감수하면서까지 호미질을 할까? 물론 최종 목표는 콩 수확량을 늘리는데 있겠지만 여기에 과학적인 요소가 숨어있다. 토양학에서는 토양 피각(Soil Crust)이라는 용어가 있다. 토양 피각 현상은 유기물이 부족한 토양에서 자주 일어나는 데 빗물이 토양에 계속 내리면 일부 토양 입자는 밀가루처럼 아주 잘게 깨져 고운 입자로 변한다. 비가 그치고 햇볕이 나면 토양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잘게 부숴진 토양 입자들끼리 서로 뭉쳐 토양 표면은 빵 껍질 조각처럼 딱딱한 층을 만든다. 이것을 토양 피각(Soil Crust) 현상이라 부른다. 영어로 빵 껍질을 ‘Crust’라 한다. 쉽게 이해하려면 빵 안쪽은 부드럽지만 빵껍질은 딱딱한 층으로 덮여 있는 바게트 빵을 상상하면 된다. 토양 피각이 발생되면 대기 중에 있는 공기가 토양 속으로 침투하기 어렵고, 또한 각종 토양 가스들이 토양 바깥으로 배출되기 어렵다. 호미질은 이런 토양 피각을 파괴함으로써 대기와 토양간의 공기와 가스 교환을 순조롭게 해준다. 작물 뿌리는 사람처럼 산소를 호흡한다. 호흡하지 못하면 질식해서 죽는다. 또한 뿌리 주변에 나쁜 토양 가스들이 많으면 뿌리가 상해 작물이 잘 자라지 못한다. 호미질은 빵조각처럼 딱딱한 토양 피각을 파괴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해준다. >박남훈 또한 호미질은 작물 뿌리 쪽으로 주변 토양을 옮겨줌으로써 북쳐기 효과가 있고 흩어져 있는 영양분을 뿌리 주변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한다. 즉 호미질을 작물 뿌리 쪽으로 둥그렇게 해줌으로서 배수 효과와 영양분 공급 효과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어 작물이 잘 자란다. 그래서 호미질을 자주 하는 집의 작물은 건강하게 잘 자란다. 거기에는 잡초 제거 이외에 과학이 숨어 있고 아낙네들의 고단함이 녹아있다. 남정네들은 호미질을 오랫동안 할 수 없다. 아마 신체 구조와 끈기 부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평생 동안 땡볕에서 흙에 살 붙이고 하루 종일 엉덩이를 끌면서 빠른 손놀림을 하며 앞으로 나가는 이런 분들을 우리는 한 분야의 전문가로 존중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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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따라잡기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사적 제523호(하)-여수 석보는 평지에 축조된 방형의 성곽시설... -해안지역의 관방 유적으로 이순신 관련 관광자원 활용도 높다... 난중일기 중에서... 임진 4월 18일(정미) 아침에 흐림(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방이 석보창에 군사를 인솔하고 오지 않으므로 붙잡아 가두었다). 壬辰 四月 十八日 丁未 朝陰 (夕 順天領軍兵房 留在石堡倉 不爲領付 故捉致因禁 ) 병신10월 5일(무진) 흐림(남양 아저씨가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일찍 부르기에 다녀왔다. 남해현령(박대남)과 함께 이야기 했다. 비 올 징후가 많다. 순천부사(배응경)은 석보창에서 잤다). 丙申 十月 五日 戊辰 陰 ( 南陽叔主大祭早招 故往來 與南海話 多有雨徵 順天宿石堡倉 ) <고지도에 나오는 여수석보> 여수석보는 당시 널리 축조되었던 산지나 평산지역에 마련한 성곽과 달리 평지에 마련된 방형의 소규모형태의 석보로 출발하였다. 남벽은 178m, 서벽은 171m, 북벽 186m, 동벽은 168m 내외로 성벽 전체 둘레가 703m 내외이다. 남벽은 남벽중앙의 추정 문지를 중심으로 동서방형으로 일직선으로 축조된 성벽으로 남문지의 동측 약15m 지점에 치(雉) 또는 적대(敵臺)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고, 이런 치는 평지성에 있어서 각 방면에 성벽에 2~3개 정도는 마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한 곳만 보이고 있으며, 성벽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다른 방향의 성벽보다 양호한 편이다. 동벽은 남북방향에서 약10°정도 동남쪽으로 기울어진 직선형의 성벽으로, 현재는 성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벽의 바깥쪽에 마련된 대로를 따라 동문 쪽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다. 석보가 활용되고 있었던 시기에도 동문의 활용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동벽은 비교적 유구가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고, 동벽중앙에 동문지가 마련되어 있지만, 동벽 북쪽지역은 민가가 있었던 곳으로 성벽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다. 북벽은 다른 성벽에 비해 다소 길다. 북벽외부는 성벽가까이까지 농으로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성벽의 지대석(地臺石)까지 노출되는 등 성벽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서벽은 다른 방향의 성벽보다 보존상태가 상대적으로 나쁜 상태이며, 성벽의 중심지에 추정되는 서문지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은 곳이다. 서벽의 남쪽구간은 그간 과수원으로, 북쪽은 논으로 이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성벽가까이로 관개수로가 있고, 서남쪽의 성벽유구는 성벽의 뒤채움 돌만 남아 있는 정도로 훼손정도가 심한 편이다. 여수석보의 성문은 남문지와 동문지 등이 확인되었으니, 서문지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정확한 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여수석보는 소규모의 석보로 출발한 성곽이기 때문에 성문을 각 방향마다 모두 두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 지고 있으며, 북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남문지는 남벽중심지역에 마련되어 있는데, 폭4.7m 길이 8.7m 내외로 문루(門扉)는 성벽외부에서 안쪽으로 약 1.5m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로에는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문지도리석이 보이고, 박석(薄石)이 노출되어 있어 이곳에 마련된 문루는 초석을 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누문식(樓門式)형식으로 추정된다. 동문지는 동벽의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약20m 북쪽에 위치하나 명확한 문지유구가 노출된 것은 아니지만 폭4.7m 통로 폭 7.7m로 남문과 비슷한 규모로 추정된다. 문지에는 문지도리석이 보이고 내부에는 통로를 구성하는 측벽의 성돌이 보이고, 이곳의 문루도 남문지와 같은 형태의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수석보 내 성내시설에는 주로 건물지, 주거지, 연지 및 우물지 등이 조사 발굴되었다. 건물지에는 활용목적에 따라 관아 건물을 비롯한 다양한 건물과 창성(倉城)으로서 가장 상징적인 대규모의 창고(倉庫)건물지 등이 있었다고 보여 진다. 현재까지 성내 여러 곳의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으나, 그간 성내에는 지반 교란이 심하여 제대로 원상이 보이는 건물유구는 적은 편이다. 가장 남쪽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초석지의 위치에서 건물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성내 중심부에서 약간 동쪽에 위치한 곳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거주지가 26기 정도 확인되고 있다. 조선시대 석보 이전부터 생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나, 한 곳의 주거지를 시대적으로 계속 이용함으로써 건물유구나 유적이 혼재함을 알 수 있다. 성곽에서 필수적인 시설의 하나가 연지를 비롯한 취수시설이다. 여수석보에는 성내에 우물이 3개소 있다고 한다. 우물지는 성의 중심에서 남서쪽 36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면상 원형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육각에 가까운 형태이다. 내경이 1.6m이고, 외경이 2.7m 내외, 우물깊이는 2.1m로, 우물을 조성하기 위해 사용된 석재는 30~40cm 정도의 할석을 사용하고 있다. 연지는 성의 서쪽중앙에서 남북으로 길게 조성된 연지유구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모를 둥글게 한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길이 20.6m, 폭9.5m,길이 0.9~1.4m 내외로 호안을 전부 석축으로 하지 않고, 상부의 태두리만 석축한 형식을 띠고 있다. <여수 석보 남문지/적대/해자/남쪽 성벽 등> 여수석보 성외의 대표적인 시설은 해자이다. 여수석보는 평지성이기 때문에 해자의 필요성은 다른 성들에 비해 필요성이 큰 편이었다. 여수석보의 해자는 성벽에서 약 5.5m내외의 거리에 폭은 4.5~5.0m, 깊이는 1.0~1.4m내외의 석축으로 조성된 형식으로, 성의 와벽을 따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깥에 마련되어 있었다. 특히 동문지로 통하는 외부의 해자가 진입도로로 인하여 절단되어 있었고, 동문지 앞에는 해자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수 석보는 조선 시대(15세기 중반) 널리 활용되었던 산지나 평산 지역이 아닌 평지에 축조된 방형의 성곽시설인데, 3차례의 발굴조사와 학술대회 등을 통하여 유적의 성격을 확인하였다. 여수 석보는 처음에는 군사적인 방어위주의 석보(돌로 쌓은 성)에서 출발하여 점차 관청용 물자비축의 창고와 장시(시장) 기능으로 활용되는 등 다양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주목되는 유적이다. 또한 체성부(성벽의 몸체 부분)와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의 잔존상태가 양호하다. 15세기 중반 평지부에 방형으로 축조된 육군 진보(각 지방을 지키던 군사조직이 주둔하던 소규모의 성)로서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을 세워쌓기한 점, 대형의 지대석을 사용한 점 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기 힘든 시대적인 한정성·희소성을 지닌 귀중한 유적이다. 여수 석보는 조선시대 성곽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여수 석보의 성벽은 외벽 바깥쪽 1m 범위에서부터 내측의 약 4.15m~4.5m까지 약 5~5.5m 구간의 지면에 20cm 내외의 쪼갠 돌을 거칠게 다듬은 할석재와 판석재를 깔았다. 성벽 등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터에 쌓은 돌인 지대석을 놓은 후 외벽을 돌로 쌓고 그 뒷면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우는 뒤채움을 한 후 성벽의 윗부분과 성벽 안쪽으로 흙을 경사지게 덮어 마무리한 내탁법으로 축조하였다. 지대석 위에 20~30cm 가량 뒤로 물려 1~2.6m 정도의 대형 할석으로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의 성돌을 세워서 쌓는 특징을 보여 준다. 2단부터는 상부로 갈수록 작은 성돌을 사용하여 쌓은 조선시대의 성곽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으나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의 성돌을 세워쌓기한 점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양상이다. 특히 성곽의 네모서리의 각을 죽여 둥글게 처리한 점에서 다른 성곽과 차별성을 보이는 성이다. 여수 석보는 전라도 육군이 외적 방어의 임무를 맡아 보는 대표적인 요충지에 축조된 관방시설로서 기능하기 시작하여 세금을 수납하여 보관하던 창성 및 장시 등의 사회·경제적인 기능으로의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변화모습을 잘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한 복합유적이다. 여수 석보는 해안 지역의 관방시설을 비교 분석 할 수 있는 유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남해안과 순천 등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여러 교통로가 교차하는 결절점에 위치하여 군사·교통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하였고. 시공간적으로 변화가 이루어졌던 조선시대의 창성과 장시 등을 연구할 수 유적공간이다. 현재 여수국가산단의 진입로에 위치하여 과거의 교통로의 결절점임을 입증하고 있다. 인근의 여수 흥국사와 묘도 및 전라좌수영의 유물·유적과 연계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도를 높일 수 있는 유적이다. 또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여수 석보(석보창)를 활용하여 여수지역에 산재해 있는 이순신 관련 유물·유적과 연계하여 ‘호국충절의 도시 여수’임을 재삼 강조할 수 있다. <여수 석보 동문지내 비석> 동문지 내에 비석이 2기가 있다. 모두 전·후면이 마모되어 있지만, ‘水軍節度使李公寅熙永世不忘碑’·‘水軍節度使金公魯甲恤民善政碑’라 음각되어 있다 전해진다. 여수 석보의 복원을 통하여 주변 경관을 정비하고, 여수 석보촌 민속마을 조성하여 창성과 장시의 옛 모습 등을 재현한다면 여수 석보가 가지고 있는 복합유적으로써의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다. -민대기 문화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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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 쓰레기 심각성 정부는 깨달아야”해양쓰레기 문제와 해양오염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회가 지난 20일 오후 2시 &#160;고흥군 도양읍민 회관에서 열렸다. 더불어민주당 고흥-보성-장흥-강진 지역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이번 토론회는 ‘해양오염 실태 및 해결방안’이란 주제로 김승잠 전 국회의원 발제로 진행됐다.이 자리에서 발제자는 “고흥이 바다가 3면으로 둘러싸여있고 나머지3개 군도 해양을 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특성이 비슷다. 이런 이유로 우리지역을 어떻게 하든 발전시키는데 역점을 둬야하겠다”고 강조했다.&#160;이어 “지금 도시에 나가있는 분들이 다시 우리 지역으로 와서 앞으로 우리지역을 지키면서 농어촌에 여러 가지 특수한 작물이라 던가 앞으로 그동안에 우리가 해왔던 농수산생산물들 그런 것들이 계속 생산해내고 지키려면 정말로 우리지역에 환경문제가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또한 “구제역과 AI한번 터지면 해당 지역에서 애지중지하며 아꼈던 가축들이 단 한 번에 살 처분 당하지 않는가, 또 소비하는 도시에서는 농수축산물을 먹지 않게 된다. 결국은 문제는 다시 우리한테 돌아가게 되어있다”고 강조했다.&#160;청정 바닷가에서 어패류 오염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지적했다.“환경을 지키는 것은 앞으로 우리를 위해서 지켜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잘 지키면 지킨 값이 다시 우리한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해양자원은 앞으로 우리세대 뿐만 아니라 우리 다음세대 한 테도 깨끗이 쓰고 물려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토론자들은 “해양쓰레기를 수거해가지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족한 예산이 많다. 토론회를 준비하다 보니까 KBS에서 서남해안 특히 해수욕장 주변으로 해서 쓰레기가 너무 심각하다는 보도를 봤다”고 경고했다. 1년에 2만6000톤씩의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는데 수거하는 쓰레기양은 40톤도 못 미친다고 합니다. 수거하는 쓰레기 이것을 또 처리할 수 있는 비용이 없기 때문에 그냥 모아만 놨지 이것을 태우거나 아니면 소각하거나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특히 우리 민주당에서 이런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한번 이야기를 모아서 토론회 결과를 그대로 이것을 사장시킬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다시 정리하겠고 밝혔다. 이어 “해수부나 기획재정부 등에 올려서 남해안의 쓰레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들은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다. 특히 예산문제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예산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를 해서 지금보다도 필요한 예산이 얼마만큼 필요로 하다는 것 등을 적시를 해서 우리 지역에 해양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예산이 책정될 수 있도록 힘 모아 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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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자연이다]<1>하병연 박사 (경상대학교 학술교수) 작물 심어 놓기만 하면 그냥 된다는 생각 많지만 토양도 작물 가꾸듯 가꿔야 좋은 토양이 된다심어야 할 토양에 가장 적합한 작물 선택도 중요 귀농하거나 전문 농업인으로 생활하거나, 도시 텃밭으로 도시 농업인으로 생활하려고 할 때 제일 먼저 어떤 작물을 심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막상 농사를 시작하려니 막막하다. 그래서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선배 농업인들의 경험을 학습하기도 하고 농업에 관련된 책도 구입하여 나름대로 농사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쌓는다. 또한 주변 농업인들에게 농사에 관한 노하우를 묻기도 하고 직접 재배 농지를 찾아 가기도 한다. 농사의 시작은 이렇게 관심에서부터 나온다. 하지만 뭔가 2% 부족한 게 있다. 농업 전문 서적들은 농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학문이고 일반 농민들은 주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다보니 농사의 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작물을 토양에 심어 놓기만 하면 토양이 알아서 키울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토양도 작물 가꾸듯 가꾸어야 좋은 토양이 된다. 적지적작(適地適作) 가장 알맞은 환경 조건~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함께 키우는 것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작물은 기상·토양·미생물 등 다양한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커간다. 작물의 종이 가지고 있는 유전성이 자연환경의 지배 밑에서 최대의 유전적 형질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작물의 생육 단계에 따라 가장 알맞은 환경 조건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 주어야 수확도 많아지고 품질도 좋아지기 때문이다. 작물을 키우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토양이 필요할 것이고 토양 속에 심을 작물의 종자나 모종이 필요하고 작물을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하고 또 작물 생육을 위해 햇빛, 물, 공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농사는 천(天), 지(地), 인(人)이 모두 조화롭게 관여하여야 한다. 이 중에서도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하늘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극심한 가뭄이나 태풍등과 같은 자연재해 앞에서는 토양이나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농사를 시작하기 위해 제일 먼저 고려하여야 할 사항은 바로 적지적작(適地適作)이다. 적지적작(適地適作)은 작물재배 토양을 잘 선택하여 작물을 가꾸는 것을 말한다. 즉, 작물을 선택할 때 내가 심어야 할 토양에 가장 적합한 작물을 선택하여 잘 가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농사에 있어서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적지적작(適地適作)을 하지 않아 두고두고 후회하는 농업인들을 많이 보았다. 특히 과수 작물은 초기 투자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피해는 많다. 작목과 농지 선택은 도시인들과 비교할 때 직장 선택과 같다. 한번 선택된 직장은 좀처럼 바꾸기 힘든 만큼 농업인들에게도 작목 선택은 매우 중요하고 힘들다. 그래서 가장 많이 고민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