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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탐방>-임병식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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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탐방>-임병식수필가

고락산성(鼓樂山城) 답사기

고락산성(鼓樂山城)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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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는 유서깊은 고성(古城)이 하나 있다. 고락산성(鼓樂山城)으로 백제시대에 축성된 성이다. 이것이 한동안은 거의 다 허물어져 방치상태에 있었다. 내가 처음 그것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지금으로부터 40년도 훨씬 전이다. 그때 산에 올라 보니 산성은 폐성(廢城)밑돌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었다. 겨우 그것이 산성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러다가 20여년 후 다시 오르니 이때는 산성을 잘 정비하여 원형의 모습을 갖춰놓고 있었다. 보는 순간 반가웠다. 잊힐 뻔 한 역사를 복원해 놓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몰랐다. 사실 이 고락산성은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주변에서는 가장 오래된 성이면서 중요한 방어진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특별한 전투기록은 없지만 인근 순천 왜성에서 고니시가 머물고 있을 때 검단산성에서 조명연합군이 대치하고 중국 진린 제독은 묘도 도독골에서, 이순신 장군은 율촌 장도에서 전투를 벌일 때, 이 성은 분명 후방 척후의 구실을 했을 것이다.

이 성은 2010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둘레는 354m, 보루의 둘레도 244m에 이른다.


성의 형태는 남쪽은 좁고 북쪽은 상대적으로 넓다. 나는 처음 허물어진 이 성을 보면서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떠올렸다. 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부역에 시달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데, 부역이라는 말은 지극히 조심해서 쓸 필요가 있다.
여기서 언급한 것은 부역(負役)인데, 이 말이 반역에 가담하는 부역(附逆)과 말이 같기 때문이다. 이 성은 높이로 따지면 해발 400미터 정도가 되나 매우 가팔라서 맨몸으로도 오르기가 숨이 찬다. 그런데 이런 곳까지 무거운 돌을 등에 지거나 밧줄로 끌어 올렸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나중에 산에 오른 나는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근자에 쌓은 것과 옛 돌은 차이가 났다. 옛날 놓인 바위는 고색이 창연했다. 그 밑돌을 보노라니 옛분들의 노역의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보기에 위험하기도 하려니와 큰 돌을 끌어 올릴 때는 무척 힘도 들었을 것 같다. 당시는 무슨 노임을 받은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가 집에서 먹을 것을 챙겨와 부역을 했을 것이다.
이곳 성의 규모로 보아 병력은 적게 잡아도 수백 명, 중대병력이상을 수용했을 것 같다.

 

나는 성을 둘러보다가 어느 분이 쓴 들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여수에 출신 정종선(丁鐘璿 1811-1878)이란 선비가 올린 상소문이다. 그 상소문 중에는 당시  여수가 순천에 병합됨에 따라 얼마나 과도하게 세금과 부역을 부담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시 속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한 상소문인 것이다.
이때는 어느 시기인가. 대략 순조 연간으로 그때는 거의 외침도 없던 때인데도 고을 백성들은 과도하게 부역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힘 있는 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고 힘없는 백성만이 온전히 과도한 부역을 떠맡고 있었다. 형편이 그 모양이니 나라의 기강이 온전히 바로 서겠는가. 그런 일단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쓴 <적성촌의 한 집을 지나며>라는 시를 보면 정황이 그려진다. 시의 일부다.

 

(전략) 아침 점심 다 굶다가 밤에 와서 밥을 짓고/ 여름에는 갈옷 입고 겨울에는 베옷 입네/ 들 냉이 깊은 싹은 땅 녹기를 기다리고,/ 이웃집 술 익어야 지게미라도 얻어 먹겠네/ 지난 봄에 꾸어 먹은 환곡이 닷 말인데/ 이 때문에 금년은 정말 못살겠네(이하 생략)

피폐한 생활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다음은 정종선 선비의 상소문 일부이다.

 

"(전략) 부역에 있어서 여수 백성들은 전라좌수영의 부역에다 순천 부역까지 나가니 한 몸으로 두 곳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한 집에 사오 명의 가족이 있다면 아버지는 수영의 부역에 나가고 아들은 순천 부역에 나가며 형은 수영 부역, 동생은 순천 부역에 나가야 하는데 그것도 어느 때에는 아침에는 수영 부역, 낮에는 순천 부역에 나가는 때가 있으니 한 몸에 두 지게를 져야 하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거리입니다.(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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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부역은 살아가는데도 힘든 마당이어서 지옥과  같았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 지역민들은 배를 부릴 줄 안다는 이유로 노 젓는 노역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동원이 되었을 테니 얼마나 고초가 많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석성을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부역에 시달린 민초들은 이 성을 쌓으며 나중 누가 기억해 주리라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성에 올라 지금은 한줌 흙과 바람으로 흝어진 그들의 영혼을 떠올리자니 그 흔적을 더듬는 일이 야릇하기만 하다.

 

이날 나는 이 고달픈 부역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그분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그 흔적을 기억하겠다는 는 의미로 조그만 돌 하나를성위에 놓아두고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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