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현장고발 - ‘봐주기 무상 불법주차’ ... 여수시 단속 뒷전, 모르거나? 봐주거나?-문화재보호구역인 여수석보지구 수년째 B관광회사버스 무상불법 주차 여수시 석창사거리 문화보호구역인 석보지구가 수년째 B관광회사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수시 여천동 426인 이곳은 자연녹지지역으로 소유자는 ‘여수시’다.혹시라도 여수시가 B관광회사에 임대를 내줬는가 싶어 부동산종합증명서를 확인해보니 B관광회사가 무상으로 불법사용하고 있었다. 여수시는 주요도로와 주택가 이면도로에 장시간 주차하는 밤샘주차 단속을 수시로 하고 있다.주로 상습주차구간을 새벽에 불시 단속한다.적발차량 중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과 여객자동운수사업법에 따라 운행정지(3~5일) 또는 과징금(10~20만원) 처분을 진행한다. 여수시는 밤샘주차를 연중 단속하고 있지만 문화재보호구역인 석보지구 불법주차만은 단속 손길이 닿지 않고 있다. 시 관계자는 모르고 있는 건가? 봐주고 있는 건가? 공정성 없이 일부 업체를 위한 봐주기 행정이 아니냐는 의혹이 없도록 여수시의 강력한 단속이 필요하다. 최향란기자
-
김영록 지사, 남해안 신성장 관광벨트 조성사업 여수 현장투어-22일 이순신 호국관광벨트, 화태~백야 연결도로 등 점검- ‘여수 선소유적 거북선 테마 공원’ 거북선 건조된 역사적인 장소, 국가 사적 제392호 지정된 곳 김영록 전라남도지사가 22일 ‘남해안 신성장 관광벨트’ 조성사업 현장 투어 마지막 일정으로 여수를 찾았다. 김 지사는 이날 올해부터 2023년까지 327억 원을 들여 메모리얼가든, 테마영상전시관, 선소체험마을, 벅수테마공원 등을 조성하는 ‘여수 선소유적 거북선 테마 공원’ 조성사업 현장을 찾았다. 이곳 선소는 거북선이 건조된 역사적인 장소로, 국가 사적 제392호로 지정된 곳이다. 호국정신을 배양한 관광자원화가 기대된다. 김 지사는 이어 여수시 관계자로부터 진남관 인근 ‘전라좌수영 동헌 복원사업’, ‘방답진성’의 문화재 지정과 복원사업 계획, 사적 제523호로 지정된 ‘석보 정비’ 사업계획 등을 보고받고 추진상황 등을 점검했다. 또한 이순신 호국관광벨트 조성사업 추진상황 점검을 마치고 올해 1월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사업으로 선정된 국도77호선 단절구간 여수 화태~백야 연결도로 조성 예정지와 현재 공사 중인 화양~적금 연도교 현장을 방문했다. 여수 화태~백야 구간은 총연장 11.4km로 5천277억 원을 들여 여수 화태도~월호도~개도~제도~백야도 등 5개 섬을 연결하는 도로다. 해상교량 4개소가 설치된다. 6월까지 KDI에서 사업적정성 검토를 마치고 익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12월까지 기본계획 용역을 수립해 2020년 초 설계, 시공 일괄입찰 방식인 턴키 공사로 발주해 2025년까지 사업을 완료할 계획이다. 화양~적금 간 연결도로는 고흥 영남~여수 적금~낭도~둔병도~조발도~화양을 잇는 사업이다. 총연장 16.9km에 5개의 교량이 가설된다. 3천838억 원을 들여 2020년 4월 준공 예정이다. 두 사업이 완료되면 고흥에서 여수 간 국도 77호선 미개통 해상구간 교통망이 완성돼 관광 편의와 섬,해양 관광자원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돼 지역 발전의 기폭제가 될 전망이다. 김 지사는 “여수는 이미 모든 국민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핫 플레이스’로 성공한 관광도시 면모를 갖췄다”며 “목포에서 여수까지 이어지는 남해안의 수려한 경관과 충무공의 호국정신 및 유적·유물, 여기에 다양한 콘텐츠를 결합해 여수가 더 큰 관광도시, 세계적인 해양관광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영주기자
-
여수시, 불법 주정차 ‘주민신고제’ 홍보 ‘박차’에 대한 시민 한 사람의 의견나는 여수석보 자리에 위치한 석창사거리 불법주차 위치를 알리고자 한다. 어떤 특정 회사에게 이익을 주는듯한 의혹이 있다면 시에서 이 의혹을 해결해야한다고 여긴다. 여수시가 지난 17일 언론보도를 통해 이번 제도를 시민에게 알렸다. 18일부터는 교차로, 시청 청사 외벽, 자동차 전용도로 육교 등 48개소에 현수막을 내걸었다. 30일에는 시청 앞 로터리에서 불법 주 정차 근절 안전다짐 대회도 추진하고 5월 초에는 소화전 시설 98개소에 대한 적색표기 설치공사를 진행해 경각심을 높일 계획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방송 매체, 버스승강장, 전광판, 시 홈페이지, SNS 등을 통한 홍보도 지속 추진할 방침이다고 밝혔다. 불법주차로 인하여 불편해소를 위한 여수시의 행정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어떤 특정 회사에 이익을 주는 불법주차 근절에도 힘써주길 바란다. 여수시민 김00
-
유적따라잡기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사적 제523호(하)-여수 석보는 평지에 축조된 방형의 성곽시설... -해안지역의 관방 유적으로 이순신 관련 관광자원 활용도 높다... 난중일기 중에서... 임진 4월 18일(정미) 아침에 흐림(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방이 석보창에 군사를 인솔하고 오지 않으므로 붙잡아 가두었다). 壬辰 四月 十八日 丁未 朝陰 (夕 順天領軍兵房 留在石堡倉 不爲領付 故捉致因禁 ) 병신10월 5일(무진) 흐림(남양 아저씨가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일찍 부르기에 다녀왔다. 남해현령(박대남)과 함께 이야기 했다. 비 올 징후가 많다. 순천부사(배응경)은 석보창에서 잤다). 丙申 十月 五日 戊辰 陰 ( 南陽叔主大祭早招 故往來 與南海話 多有雨徵 順天宿石堡倉 ) <고지도에 나오는 여수석보> 여수석보는 당시 널리 축조되었던 산지나 평산지역에 마련한 성곽과 달리 평지에 마련된 방형의 소규모형태의 석보로 출발하였다. 남벽은 178m, 서벽은 171m, 북벽 186m, 동벽은 168m 내외로 성벽 전체 둘레가 703m 내외이다. 남벽은 남벽중앙의 추정 문지를 중심으로 동서방형으로 일직선으로 축조된 성벽으로 남문지의 동측 약15m 지점에 치(雉) 또는 적대(敵臺)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고, 이런 치는 평지성에 있어서 각 방면에 성벽에 2~3개 정도는 마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한 곳만 보이고 있으며, 성벽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다른 방향의 성벽보다 양호한 편이다. 동벽은 남북방향에서 약10°정도 동남쪽으로 기울어진 직선형의 성벽으로, 현재는 성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벽의 바깥쪽에 마련된 대로를 따라 동문 쪽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다. 석보가 활용되고 있었던 시기에도 동문의 활용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동벽은 비교적 유구가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고, 동벽중앙에 동문지가 마련되어 있지만, 동벽 북쪽지역은 민가가 있었던 곳으로 성벽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다. 북벽은 다른 성벽에 비해 다소 길다. 북벽외부는 성벽가까이까지 농으로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성벽의 지대석(地臺石)까지 노출되는 등 성벽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서벽은 다른 방향의 성벽보다 보존상태가 상대적으로 나쁜 상태이며, 성벽의 중심지에 추정되는 서문지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은 곳이다. 서벽의 남쪽구간은 그간 과수원으로, 북쪽은 논으로 이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성벽가까이로 관개수로가 있고, 서남쪽의 성벽유구는 성벽의 뒤채움 돌만 남아 있는 정도로 훼손정도가 심한 편이다. 여수석보의 성문은 남문지와 동문지 등이 확인되었으니, 서문지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정확한 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여수석보는 소규모의 석보로 출발한 성곽이기 때문에 성문을 각 방향마다 모두 두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 지고 있으며, 북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남문지는 남벽중심지역에 마련되어 있는데, 폭4.7m 길이 8.7m 내외로 문루(門扉)는 성벽외부에서 안쪽으로 약 1.5m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로에는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문지도리석이 보이고, 박석(薄石)이 노출되어 있어 이곳에 마련된 문루는 초석을 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누문식(樓門式)형식으로 추정된다. 동문지는 동벽의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약20m 북쪽에 위치하나 명확한 문지유구가 노출된 것은 아니지만 폭4.7m 통로 폭 7.7m로 남문과 비슷한 규모로 추정된다. 문지에는 문지도리석이 보이고 내부에는 통로를 구성하는 측벽의 성돌이 보이고, 이곳의 문루도 남문지와 같은 형태의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수석보 내 성내시설에는 주로 건물지, 주거지, 연지 및 우물지 등이 조사 발굴되었다. 건물지에는 활용목적에 따라 관아 건물을 비롯한 다양한 건물과 창성(倉城)으로서 가장 상징적인 대규모의 창고(倉庫)건물지 등이 있었다고 보여 진다. 현재까지 성내 여러 곳의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으나, 그간 성내에는 지반 교란이 심하여 제대로 원상이 보이는 건물유구는 적은 편이다. 가장 남쪽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초석지의 위치에서 건물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성내 중심부에서 약간 동쪽에 위치한 곳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거주지가 26기 정도 확인되고 있다. 조선시대 석보 이전부터 생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나, 한 곳의 주거지를 시대적으로 계속 이용함으로써 건물유구나 유적이 혼재함을 알 수 있다. 성곽에서 필수적인 시설의 하나가 연지를 비롯한 취수시설이다. 여수석보에는 성내에 우물이 3개소 있다고 한다. 우물지는 성의 중심에서 남서쪽 36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면상 원형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육각에 가까운 형태이다. 내경이 1.6m이고, 외경이 2.7m 내외, 우물깊이는 2.1m로, 우물을 조성하기 위해 사용된 석재는 30~40cm 정도의 할석을 사용하고 있다. 연지는 성의 서쪽중앙에서 남북으로 길게 조성된 연지유구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모를 둥글게 한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길이 20.6m, 폭9.5m,길이 0.9~1.4m 내외로 호안을 전부 석축으로 하지 않고, 상부의 태두리만 석축한 형식을 띠고 있다. <여수 석보 남문지/적대/해자/남쪽 성벽 등> 여수석보 성외의 대표적인 시설은 해자이다. 여수석보는 평지성이기 때문에 해자의 필요성은 다른 성들에 비해 필요성이 큰 편이었다. 여수석보의 해자는 성벽에서 약 5.5m내외의 거리에 폭은 4.5~5.0m, 깊이는 1.0~1.4m내외의 석축으로 조성된 형식으로, 성의 와벽을 따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깥에 마련되어 있었다. 특히 동문지로 통하는 외부의 해자가 진입도로로 인하여 절단되어 있었고, 동문지 앞에는 해자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수 석보는 조선 시대(15세기 중반) 널리 활용되었던 산지나 평산 지역이 아닌 평지에 축조된 방형의 성곽시설인데, 3차례의 발굴조사와 학술대회 등을 통하여 유적의 성격을 확인하였다. 여수 석보는 처음에는 군사적인 방어위주의 석보(돌로 쌓은 성)에서 출발하여 점차 관청용 물자비축의 창고와 장시(시장) 기능으로 활용되는 등 다양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주목되는 유적이다. 또한 체성부(성벽의 몸체 부분)와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의 잔존상태가 양호하다. 15세기 중반 평지부에 방형으로 축조된 육군 진보(각 지방을 지키던 군사조직이 주둔하던 소규모의 성)로서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을 세워쌓기한 점, 대형의 지대석을 사용한 점 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기 힘든 시대적인 한정성·희소성을 지닌 귀중한 유적이다. 여수 석보는 조선시대 성곽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여수 석보의 성벽은 외벽 바깥쪽 1m 범위에서부터 내측의 약 4.15m~4.5m까지 약 5~5.5m 구간의 지면에 20cm 내외의 쪼갠 돌을 거칠게 다듬은 할석재와 판석재를 깔았다. 성벽 등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터에 쌓은 돌인 지대석을 놓은 후 외벽을 돌로 쌓고 그 뒷면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우는 뒤채움을 한 후 성벽의 윗부분과 성벽 안쪽으로 흙을 경사지게 덮어 마무리한 내탁법으로 축조하였다. 지대석 위에 20~30cm 가량 뒤로 물려 1~2.6m 정도의 대형 할석으로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의 성돌을 세워서 쌓는 특징을 보여 준다. 2단부터는 상부로 갈수록 작은 성돌을 사용하여 쌓은 조선시대의 성곽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으나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의 성돌을 세워쌓기한 점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양상이다. 특히 성곽의 네모서리의 각을 죽여 둥글게 처리한 점에서 다른 성곽과 차별성을 보이는 성이다. 여수 석보는 전라도 육군이 외적 방어의 임무를 맡아 보는 대표적인 요충지에 축조된 관방시설로서 기능하기 시작하여 세금을 수납하여 보관하던 창성 및 장시 등의 사회·경제적인 기능으로의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변화모습을 잘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한 복합유적이다. 여수 석보는 해안 지역의 관방시설을 비교 분석 할 수 있는 유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남해안과 순천 등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여러 교통로가 교차하는 결절점에 위치하여 군사·교통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하였고. 시공간적으로 변화가 이루어졌던 조선시대의 창성과 장시 등을 연구할 수 유적공간이다. 현재 여수국가산단의 진입로에 위치하여 과거의 교통로의 결절점임을 입증하고 있다. 인근의 여수 흥국사와 묘도 및 전라좌수영의 유물·유적과 연계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도를 높일 수 있는 유적이다. 또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여수 석보(석보창)를 활용하여 여수지역에 산재해 있는 이순신 관련 유물·유적과 연계하여 ‘호국충절의 도시 여수’임을 재삼 강조할 수 있다. <여수 석보 동문지내 비석> 동문지 내에 비석이 2기가 있다. 모두 전·후면이 마모되어 있지만, ‘水軍節度使李公寅熙永世不忘碑’·‘水軍節度使金公魯甲恤民善政碑’라 음각되어 있다 전해진다. 여수 석보의 복원을 통하여 주변 경관을 정비하고, 여수 석보촌 민속마을 조성하여 창성과 장시의 옛 모습 등을 재현한다면 여수 석보가 가지고 있는 복합유적으로써의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다. -민대기 문화재학박사-
-
(유적 따라잡기)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사적 제 523호 (상)-민대기 문화재학박사 난중일기에도 석보창에 관한기록이 임진4월18일(정미)와 병신10월5일(무진)에 전해지고 있다. 임진4월 18일(정미) 아침에 흐림(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방이 석보창에 군사를 인솔하고 오지 않으므로 붙잡아 가두었다). 병신10월 5일(무진) 흐림(남양 아저씨가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일찍 부르기에 다녀왔다. 남해현령(박대남)과 함께 이야기 했다. 비 올 징후가 많다. 순천부사(배응경)은 석보창에서 잤다). 여수 석보(국가사적 제523호, 2012.06.22 지정)는 여수시 여천동 86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석창이라는 명칭은 남아 있지 않지만, 주변은 모두 성내마을 또는 석창이라 불린다. 이곳은 여수 각 지역과 인근 순천시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다. 석보는 외적이나 왜구의 노략질에서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석축 시설물로서, 조선시대 수많은 진보 가운데 하나였다. 진보란 흔히 군사를 주둔시키는 곳 내지 그러한 목적 아래 축조된 성보라는 의미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진보를 ‘邊堡鎭戍’ 즉 변방의 성보로서 군사가 진수하는 곳이라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 외적을 방비하고자 각급 군관의 지휘 아래 군사를 주둔시키거나 혹은 그러한 목적으로 축조된 방어시설 중 내륙의 산성을 제외한 성보들은 모아 진보라는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수 석보의 성곽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이는데,「목책으로 진흙을 바른 성(木柵途泥城)이며, 둘레는 143보」라 하였다. 여수지역에 석보가 들어서는 단초로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존재가 조선 초기 순천도호부에 위치하였다는 소위 ‘목책도니성’이다. 이 성은 현전하는 자료에 의한 석보가 등장하기 이전 여수시의 성보시설로서 기록에 전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공식기록에서 여수를 관장한 성보로는 목책도니성이 최초이며, 바로 그 뒤를 이어 석보가 등장한다. 목책도니성은 변방의 연안지역처럼 별다른 방어시설이 없는 마을의 주민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쌓은 보루였다. 『세종실록』97 (세종24년 8월4일 신유)의 기록에 따르면, 읍성과 멀리 떨어져 방어에 취약한 바닷가 촌락에다 지역별 실정에 맞추어 ‘목책이나 석보 혹은 토축’을 마련함으로써 왜적의 급작스런 출현과 노략질에 대비토록 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수 석보는 둘레가 1,479척이고, 높이는 10척 이내이며 3개의 우물이 있다」고 서술되었다. 여기서 석보란 『여지지』에 기술되어 있는바 석성이며, 여수 석보란 순천부 동쪽 60여리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과거의 여수현이다. 따라서 성곽이 세종 때는 목책이었는데, 성종 때는 석성이었다는 것으로서, 현재의 석성은 세종대에서 성종대 사이에 쌓아진 것으로 보여 진다. 여수 석보의 존재를 알리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세조 3년(1457)이다. 『세조실록』6 (세조3년 정월 16일 신사) 하삼도의 여러 가지 진포를 몸소 살핀 도순찰사 등이 보고한 조목들 가운데 – 전라도 순천 돌산포의 경우 그 동쪽에 내례가 있고, 북쪽에 여수 석보가 있는데다 바다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서 방어에도 긴요하지를 않으니, 이제 돌산포를 혁파하고 그 선군은 내례와 여도에 나눠 소속시키도록 하소서 – 에 나오는 여수 석보가 그것이다. 성종 10년(1497) 내례포에 전라좌수영을 설치하면서 16세기부터 석보창(창고)으로 기능이 변하고, 난중일기에도 석보창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여수석보는 유일하게 해안으로만 접근이 가능했고, 이를 이용해 조선 중기에는 군수물자를 제작하고,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이 되었다. 여수석보 밖에 생긴 석보촌이라는 곳은 전국에서 모여든 장인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건설한 화치 첨산에서 삼간도 애양원 쪽으로 건설된 긴 방축인 십리방천 때문에 바닷가에 있었던 여수석보의 주변은 벌판이 되었다. 여수석보는 한 변이 170m내외이고, 전체 둘레가 703m내외의 소규모의 평지 방향의 성이다. 몇 년 전까지 여수석보의 동문지 북쪽과 동쪽의 성벽에는 여러 채의 민가와 서남쪽 모퉁이지역의 성곽 상단에도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외 석보로의 주 접근로지역인 동문지 밖에도 여러 채의 민가가 있었다. 또한 석보 내에는 서쪽 성벽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밭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석보의 외부는 논으로 활용되어 잔존유구의 일부가 훼손되기도 하였다. 여수석보는 여수석보성, 석창성, 장시 등으로 변화를 거듭한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시에서는 그간 유적의 보존과 정비를 위해 적극적으로 사유지를 매입하였고, 여수석보의 정비를 위한 지표 및 발굴조사를 지금까지 총3차례 실시하였다. 2003년 대학교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등 3개의 조사기관이 성곽,해자,성내부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성벽을 비롯한 동·남문지 및 해자와 건물지 3동과 집석유구 2개소 등이 조사되었다. 2007년 서쪽지역을 중심으로 서벽과 수구,해자,건물지,우물,연못지 등이 조사되었다. 2014년부터 시작된 3차 조사에서는 중앙중심부와 나머지 부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26기의 주거지 유적 및 유물들이 조사되었다. 여수석보는 성벽과 성문 그리고 성내의 각종 건물지와 외부의 해자와 성내의 주거지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고, 현재는 유적성격의 파악이 가능한 정도로 조사가 이루어진 상태다. 특히 여수석보의 주요시설인 성벽을 비롯한 성문지, 그리고 성내 건물지 등은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유적전체가 뚜렷이 확인되는 정도로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어 다른 성곽에 비해 여전히 양호하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下) 다음호에서 계속
-
여수 남산공원 자연친화형 근린공원 조성에 문제 있다는 시의회>서완석 여수시의장 여수시가 개발 방식을 놓고 주민 간 첨예한 갈등을 빚어온 남산공원. 지난달 24일 코리아리서치에 용역비 1,900만원을 들여 의뢰한 시민 514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3.3%가 ‘자연형 도심 근린공원’을 선호했다. 반면 ‘관광형 랜드마크 공원’을 선호하는 응답은 36.7%로 조사됐다. 이에 여수시는 시민들이 선호하는 자연친화형 근린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했다.하지만 시의회가 여론조사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제동을 걸고 나서 논란은 지속 될 전망이다. 국토부에서 현지실사 등을 거쳐 2018년10월, 동서남해안 및 내륙권발전 특별법에 따라 여수시 대교동 남산공원부지를 해양관관진흥지구 대상지로 선정하고 11월부터 국내외 민간투자자들에게 투지설명회를 개최해 준다고 발표했다. 에에 대해 서완석의장은 “남산공원을 우리시 재정 210억원(시비) 이상을 투자해 일반적인 도시근린공원으로 조성할 것 아니라 이 특별법의 특례와 국토부의 국내외 투자설명회 지원을 받아 대규모 민간자본을 유치해 여수를 상징할 수 있는 관광형 공원을 조성하여 일자리도 창출하고 지역경제도 살리고, 지방세 수입 증대, 부지 매각비 및 공원 조성비 등 약 400억원 이상의 시비도 절약하는 등 막대한 경제유발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여론조사에 앞서 여수시민에게 자세히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에 응했던 여수시민 대다수는 낭만포차 이전지로 선정된 종화동 거북선대교 아래 부지가 국토익산관리청으로부터 사용허가를 받기 어렵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고, 석창 여수 석보자리도 문화재 보호구역이라서 문화재청으로부터 현상변경 허가를 받기 어렵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라며 이렇듯 자세한 정보를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여론조사 결과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행정의 중대한 과오와 실패를 초래하게 될 수도 있음을 강하게 어필하고 나섰다. 또한 서완석 의장은 “시민여론 조사결과는 참고자료로 활용하고 전문가와, 주민대표, 지역 오피니어 리더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남산공원의 발전방향을 심사숙고하여 절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