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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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1019 창작오페라 침묵 <바다에 핀 동백> 제작 현장-10월18~19일 오후7시30분 GS칼텍스대공연장 개막을 앞두고 ▲창작오페라 침묵 <바다에 핀 동백> 포스터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 여순사건을 다룬 오페라 '침묵-바다에 핀 동백'(박영란 작곡, 탁계석/강해수 대본)이 오는 18일과 19일 사건 기념일에 맞추어 GS칼텍스 예울마루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작년 초연무대가 대성황을 이루었던 만큼 이번 재연에도 각계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80년이 다 되어가며 잊혀져가는 여순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기획된 공연이지만, 오페라라는 장르의 특성상 음악과 성악가들의 연주력은 공연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박영란의 음악은 시대정신과 한을 담고 있는 한편 누구나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름다운 선율과 국악과 양악의 조화를 꾀한 작법이 특징인데, 이 음악의 정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성악진의 기용이 필수적이다. 극을 홀로 이끌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프리마돈나 '점례'(소프라노 윤한나), 고뇌에 찬 드라마틱한 표현과 고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칠성'(테너 이형석), 묵직한 저음과 복잡한 심경을 표현해야 하는 '점례 모'(메조소프라노 손소희/문주리), 이번 재연때 추가된 '점례 부/유가족'(베이스 국동현) 등 국내 정상급의 성악진 가운데서도 유독 이번 재연에서 눈에 뛰는 배역이 하나 있다. 바로 여순사건 당시 총과 일본도로 수많은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살한 '김종원'을 모티브로 한 '장교'이다. 등장시간은 20분이 채 되지 않지만, 가장 임팩트있는 역할이다. 공동 대본 집필자이자 이번 공연의 총감독을 맡은 강해수 여수심포니오케스트라 감독은 작년 초연때 장교역을 맡았던 바리톤 임봉석의 호연에 버금가는 성악가를 섭외하는 일에 큰 부담을 느꼈었다고 한다. "뛰어난 목소리와 연기력을 가진 성악가를 원했죠. 오래도록 고심했는데 역설적이게도 잔혹한 살인마 역을 발견한 곳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이 캐스팅하신 것 같아요." 강 감독은 출석하던 교회에서 바리톤 '김정훈'의 찬양을 듣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감동하여 그를 전격적으로 장교 역에 기용하였다. 놀랍게도 김정훈은 성악을 전공한 적이 없으며, 타고난 좋은 목소리로 노래를 좋아하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처음엔 제가 기성 성악가들과 나란히 공연한다는 것에 많은 부담을 느꼈죠. 하지만 감독님께서 하나님이 인연을 주신 것 같다고 말씀하신 것과 여순사건을 알리자는 역사적인 사명감에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첫 연습에 김정훈이 나타났을 때, 연출가 유희문과 지휘자 조정현을 비롯, 성악진과 스텝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마치 실존인물 김종원을 보는듯한 싱크로율과 좌중을 압도하는 강력한 대사와 연기, 힘있는 목소리까지. "많은 국내외 정상급 가수들과 함께 작업했지만 김정훈의 기량은 그분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습니다.″ 김정훈은 여수 출신 토박이이며, 심지어 여순사건 학살이 자행된 비극의 장소인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11일 진행된 총연습은 여러 기자들과 각계 인사들이 참관하였는데, 김정훈의 냉혹한 연기와 목소리로 인해 모두가 극에 깊이 몰입하여 공포와 비통함이 섞인 감정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여순사건을 더 널리 알리고, 성악가로서도 더 좋은 공연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배역에 깊숙히 몰입해 있다가 빠져나온 김정훈은 그저 소박하고 예의 바른 동네 삼촌 같았다. 김정훈이 들고 있는 소품 일본도가 마치 이번 재연의 성공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듯 보였다. 10월 18일과 19일 양이틀간 GS칼텍스예울마루 대공연장에서 공연이 사뭇 기대된다. /강해수("바다에 핀 동백" 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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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최상철 대한적십자사 봉사회 광주.전남 협의회장우리 사회 관심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인생을 바친, 직업이 봉사인 사람 최상철 대한적십자사 봉사회 광주.전남 협의회장 말이 아닌 행동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얼굴이 환하고 선한 기운이 나온다. 사회에 좋은 일을 하고 나눔을 실천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직업을 봉사라고 생각하고 22년을 봉사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다.다음은 대한적십자사 봉사회 광주.전남 협의회 최상철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대한적십자사 봉사회에서 어떤 봉사를 하시나요? 저는 대한적십자사에서 올해로 22년째 봉사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한 적집자사는 전시에는 국군의 의료보조기관으로 부상자에 대한 구휼사업을 기본임무로 하고, 평상시에는 각종 구호, 봉사, 인간보호, 건강증진활동, 친선협력, 보건,혈액사업, 이산가족 상봉과 재결합 사업 등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재난재해 사고 시에도 봉사를 하시는 거지요? 강원도 화재 때는 광주 전남팀 적집사회에서 봉사를 다녀왔고요온 국민이 함께 아파했던 세월호 사고 때는 저희 여수협의회에서도 같이 가서 봉사와 위로를 하고 왔습니다.2017년 여수교동에 위치한 수산시장 화재가 있었잖아요. 120개 점포 중에 116개 점포가 전소되는 큰 화재였는데요, 피해를 입어 힘든 상인들을 위해 13일 동안 세끼 식사를 준비해드리는 봉사를 했었습니다. -여수지구회장 6년을 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는 어떤 것인가요? 라오스 해외봉사를 3회 다녀온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라오스에 있는 학교에 교실 지어주고, 컴퓨터도 설치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어려운 사람이 있지만 이제 우리나라는 최소한 밥을 굶는 일은 없는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라오스는 아직도 굶어 죽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제가 65년생인데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도 교실바닥이 맨땅이지는 않았어요. 나무 바닥이었지요. 제가 다녀온 라오스 초등학교는 교실바닥이 그냥 흙바닥 진흙탕입니다. 저의 유년도 힘들고 가난했는데 그래도 맨발로 다니지는 않았거든요. 그 아이들이 맨발로 다니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봉사의 길은 어떻게 접하게 되셨나요?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를 중학교만 다니고 고등학교 진학을 못했습니다. 중학교3학년 때 기술선생님께서 고등학교 진학할 형편이 안 된다는 걸 아시고 밥 벌어 먹고 살라고 전기기술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 기술선생님 성함은 기억나지 않지만 별명이 피카소선생님이셨어요. 그 피카소 선생님께서 저와 같은 가정형편 어려운 제자들을 위해 전기기술을 가르쳐주시는 것도 봉사였지요. 가정형편 어렵다고 혹시 나쁜 길로 빠질까봐 사랑과 나눔을 주신거지요. 그 때 봉사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중학교 졸업하고 피카소선생님의 전기기술 덕분에 취직하여 열심히 살았고 성인이 되어 고등학교도 다시 다녔습니다.봉사의 길은 25년 전 의용소방대를 선배의 권유로 들어가서 저도 누군가를 위해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시작했습니다. -봉사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도 하는데요 봉사를 시간 날 때 한다는 사람은 절대 봉사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봉사접수가 필요하거나 봉사사진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누가 제 직업을 물으면 봉사가 직업이라고 말합니다. 처음 봉사를 시작했을 때는 봉사 하는 게 큰 자랑도 아니다 싶어 주위에 알리지도 않았고 먹고살기도 힘든데 봉사하고 다닌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 봉사활동을 몰래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온 동네 알리려고 합니다. 봉사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계몽하고 그 때 그 때 시간을 조금씩 배려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최상철 회장님께서는 좋은 마음 정의로운 마음으로 묵묵히 봉사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주변에서 오해의 말씀도 들으셨다고요? 저에게 정치하려고 봉사를 온가족이 하는 거 아니냐는 말씀을 많이 하였습니다. 저는 늘 한결같이 말합니다. 진정을 가지고 마음으로 우러나서 봉사를 하는 거지 정치에 뜻은 전혀 없습니다. 정치는 정치에 뜻이 있고 정치를 잘하는 분들이 하시면 되고 저는 봉사가 직업이니 앞으로도 봉사에만 전념할 것입니다. 아들은 4살부터 저를 따라 섬봉사를 다녔고 지금은 여수지구협회 E세대 봉사회 회장(최정욱)으로 봉사하고 있고 딸(최은정)은 성인이 된 후부터 봉사회에 들어왔습니다. 아내 우양희씨는 가족들이 열심히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밀어주고 사업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우양희 여사님께서는 어떤 사업으로 봉사지원 및 가족 생계를 이끌고 계시나요? LG선물셋트. CJ특판. 애경특판. 화장품 특판. 네슬러. 무궁화대리점 등 선물셋트 전문 상호유통을 하고 있습니다. 야유회, 체육대회, 행사선물셋트와 기념타월, 츄리닝 등 기타 특판전문점을 하는데 제가 봉사한다고 자리를 많이 비우기 때문에 혼자 고생이 많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제가 받은 많은 상은 모두 아내 우양희 여사의 내조 덕분이라고 늘 자랑합니다. -섬봉사도 많이 다녔다고 하셨는데 훈훈한 미담도 많을 것 같아요 대두라도 섬봉사 1박2일 갔을 때 보통 마을 회관이나 노인당에서 1박을 하게 되는데 그 곳에서는 어느 어르신 댁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님이 오랜만에 만난 아들같은 저희들에게 새벽 2시가 넘도록 당신이 살아온 세월과 자식자랑 등을 하셨어요. 처음에는 저희도 말벗이 그리운 어머님께 네, 네 하면서 장단을 맞추고 듣다가 꾸뻑꾸뻑 졸기도 하였는데 새벽 2시가 넘자 도저히 못버티고 앉은채로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어머님께서 아침 일찍 아침밥을 차려주셨어요. 김치와 된장국이었는데 참으로 맛있게 감사히 먹고 돌아오는데 눈물을 흐리는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함께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짠합니다. 말씀으로는 자식자랑을 하셨지만 명절 때도 찾아오지 않는 아들을 밤새 자랑하셨던 것이지요. - 앞으로 광주.전남 협의회 회장으로 어떤 계획이 있을까요? 라오스 해외봉사를 계속 지속적으로 하고 싶습니다. 저도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 다니기 어려웠던 유년이 있었기에 학교봉사에 특별한 애착이 있습니다. 칠판도 만들어주고 아이들이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둘째로는 봉사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선배회원인 저희들이 진정성 있고 참다운 마음으로 봉사에 임하여 새로운 회원들을 올바른 봉사의 길로 함께 갈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봉사는 미쳐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봉사에 미친 놈, 봉사가 직업인 한 사람으로 앞으로 많은 봉사자들과 좋은 길을 함께 하겠습니다. 최향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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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자연이다 3 _ 먹을 것 많은 토양에서 꽃도 많이 핀다먹을 것 많은 토양에서 꽃도 많이 핀다-영취산 진달래 산성토양 잘 자란다 토양의 산도는 토양 중에 있는 활성 수소이온(H+) 농도를 측정하여 pH 7.0을 중성으로 하여 이보다 낮으면 산성토양, 높으면 알카리성 토양이라고 한다. 산성 토양이라고 해서 환경오염과 독성이 심한 죽은 토양이 아니고 염기성 이온인 칼슘이온(Ca++)과 마그네슘이온(Mg++) 양보다 상대적으로 수소이온(H+) 양이 많은 토양을 말한다. 대부분의 작물은 산성에서 잘 자라지 않고 중성 토양 부근에서 잘 자라 토양 중 양분의 유효도를 함께 고려하여 pH 6.0~ 6.5 부근이 되도록 토양관리를 하는 것이 좋다. 산성 토양에 잘 자라는 식물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나무(pH 5.0~5.5)와 진달래(pH 4.5~5.0)이다. 토양 pH가 중성 정도로 올라가면 소나무와 진달래는 생육 피해를 입고 그 자리에 활엽수가 자란다. 우리나라 전 국토가 소나무와 진달래가 많은 이유는 우리나라 산림지 토양의 산도가 대부분 산성토양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2009년도에 여수 영취산 진달래 군락지 토양과 식물체를 각각 분석하여 무기양분이 진달래 생육과 꽃 개화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적이 있다. 그때 당시 진달래나무 생육과 꽃 상태가 양호한 GS칼텍스 쪽 정상 부근과 진달래 나무 생육과 꽃 상태가 좋지 않은 봉우재 부근을 각각 비교하여 분석하였는데 양쪽 다 토양 pH는 4.2~4.3 정도로 유사하였지만 GS칼텍스 쪽 정상 부근이 봉우재보다 토양 양분 함량이 대체적으로 높았고 꽃잎 내 양분 함량도 높아 무기 양분 함량이 높을수록 진달래 나무 생육과 꽃 개화 상태가 양호하다는 결론을 내린 적 있다. 박남훈 그림 결국 먹을 것이 많은 토양에서 꽃도 많이 핀다는 뻔한 이치이었다. 전국 3대 진달래 군락지 중에 하나인 영취산은 매년 3월말에서 4월초에 진달래가 만개하여 산 전체가 분홍빛으로 물든다. 이런 장관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달래 생육에 적합한 토양관리와 양분관리가 필요하다. 해마다 변화하는 기후 환경과 여천공단 주변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꽃도 사람 돌보 듯 돌보아야 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토양개량과 무기양분 공급을 위해 토양개량제와 화학비료를 꽃 주변 토양에 뿌려주면 된다. 축제의주인공인 진달래 나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 토양 비료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 보는 것도 좋다. 하병연 이학박사, 시인 국립경상대학교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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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삶을 능동적으로 리드하는 멋진 사람김미진 국제로타리클럽 3610지구 신생 어드바이저 아무리 멋진 옷을 입고 번쩍이는 귀걸이를 하도 왠지 아름답지 않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 자체만으로도 100% 빛나는 사람이 있다. 멋진 사람은 맨 몸이 보일까봐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를 리더라고 칭하지 않아도 리더의 기질이 있어 두려움 없는 사람이다. 때로는 여론의 반대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사람, 그런 사람이 여성이라서 더욱 숭고하고 값질 때가 있다. 소외받는 곳,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곳이면 서슴치 않고 달려가 손잡아주는 여성리더가 있다. 다음은 국제로타리클럽 3610지구 김미진 신생 어드바이저와의 일문일답이다. - 클럽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할까요? 먼저 자신을 낮춰야겠죠? 클럽의 목적에 맞춰 회원들과 일체감을 갖는 리더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클럽을 회원 개인의 이익과 목적달성을 위해 활용한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발생될 수도 있으니까요. -국제로타리클럽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세계최초 민간봉사 단체로 110년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120만 이웃과 친구들의 글로벌 연결망입니다. 우리 회원들은 다함께 열정과 에너지 창의력과 지혜를 합하여 지구촌과 지역사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창조적 변화를 끊임없이 실천하고 있습니다. 국제친선교류와 세계평화와 유호증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국제 로타리클럽이 구체적으로 어떤 국내외활동을 하나요? 세계 3만722개의 지구가 ‘세상에 감동을’ 이라는 슬로건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문화, 인종, 종교를 초월한 단체로 소아마비, 문맹퇴치, 전쟁방지 캠페인을 합니다. 평화증진, 기아, 질병퇴치, 환경보건, 위생개선, 모자보건향상, 교육지원 등 인도적인 봉사를 제공합니다. 국제로타리 클럽은 행복을 사람들과 함께하고 나에게 주어진 풍요를 환원하는 일을 한다고 보면 되겠네요. -국제로타리 클럽에서 김미진회장의 주요 활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여수사랑클럽을 창립했습니다. 100명 회원클럽을 스폰 창립했고 한울로타리클럽도 100인 클럽으로 성장시켰고, 대만 원만클럽과 재매결연을 맺었습니다. 특히 글로벌보조금 5만불을 지원받아 여성장애인 푸드트럭을 기증하였습니다. 여수지역 여성장애인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업이었고 여성장애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랬습니다. -그 동안 많은 봉사활동을 하셨고 수많은 상을 받으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상이 있다면? 국제 로타리 3610지구 80개 클럽에서 2016-17년 종합대상을 받은 겁니다. 저 혼자만의 상이 아닌 종합대상이라서 더 뜻깊은 것 같아요. 회원들과 함께 수고했던 많은 날들에 대한 뜻깊은 뿌듯함이고 앞으로 더욱더 낮은 곳으로 이 세상을 밝고 환하게 만드는데 노력할 때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해외봉사 등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요. 캄보디아 청소년교류 및 해외문화 체험활동을 갔을 때 씨엠림 근처 모민초등학교 어린 아이들이 오염된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것을 봤습니다. 수인성질병에 걸려 눈도 못 뜨고 배불뚝이가 되어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즉석에서 우물을 파주자고 했습니다. 깨끗한 물을 자유롭게 마시는 그 아이들을 보고 보람을 느꼈고 앞으로도 우물기증사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현재 결혼정보회사 웨드를 운영하시는데, 웨드가 추구하는 결혼관이 있다면요? 결혼이 서로 상생하고 1+1의 인간 삶의 질에 도움과 행복의 원천이 되길 희망합니다. 아가페사랑은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정신적 육체적인 사랑을 위해서는 서로를 위한 배례가 있어야만 완전한 사랑이라는 결혼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 여성과 한국노총각의 커플들이 탄생하여 아들 딸 낳고 행복한 가정꾸리는 모습을 보면 흐뭇합니다. 국가 인구증가정책에도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라 여기고 소신껏 열심히 중매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김미진에게 봉사는 무엇인가요? 봉사는 저 자신과의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사로 보람을 느낄 수 있고 나아가서는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위안이지요. -진정으로 멋지게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내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을 구속이라는 틀에 가두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것. 국가와 인류사회를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삶이 빛나는 멋진 삶이 아닐까요! 최향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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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보성작가의 춤추는 한글회화-문자가 살을 지닌 몸으로 거듭나는 세계를 펼치고 있어 한글회화를 구축한 금보성 작가 초대전이 3월28일 까지 여수미술관에서 전시중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50회 전시기념으로 1월 인천 잇다스페이스와 2월 서울 금보성아트센터 그리고 3월은 고향 여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는 “고향 여수는 심장 같아 늘 마음 설레고 꽃잎처럼 여린 곳이다. 바다와 섬을 드나드는 뱃고동 소릴 듣고서 문학의 길을 가려다 어린 스무 살에 열었던 첫 전시는 그 시절 유행했던 詩畵展처럼 그림은 詩고 詩는 그림이었다” 고 말한다. 또한 뿌리가 문학이었기에 작가로서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금작가는 회화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장르와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철학과 문학이라는 사유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이번 금보성 작가의 고향 여수에서의 전시는 한글 자음과 모음의 적합한 배열의 재구성으로, 문자가 살을 지닌 몸으로 거듭나는 세계를 펼치고 있어 지역 문화예술에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최향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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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따라잡기)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사적 제 523호 (상)-민대기 문화재학박사 난중일기에도 석보창에 관한기록이 임진4월18일(정미)와 병신10월5일(무진)에 전해지고 있다. 임진4월 18일(정미) 아침에 흐림(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방이 석보창에 군사를 인솔하고 오지 않으므로 붙잡아 가두었다). 병신10월 5일(무진) 흐림(남양 아저씨가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일찍 부르기에 다녀왔다. 남해현령(박대남)과 함께 이야기 했다. 비 올 징후가 많다. 순천부사(배응경)은 석보창에서 잤다). 여수 석보(국가사적 제523호, 2012.06.22 지정)는 여수시 여천동 86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석창이라는 명칭은 남아 있지 않지만, 주변은 모두 성내마을 또는 석창이라 불린다. 이곳은 여수 각 지역과 인근 순천시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다. 석보는 외적이나 왜구의 노략질에서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석축 시설물로서, 조선시대 수많은 진보 가운데 하나였다. 진보란 흔히 군사를 주둔시키는 곳 내지 그러한 목적 아래 축조된 성보라는 의미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진보를 ‘邊堡鎭戍’ 즉 변방의 성보로서 군사가 진수하는 곳이라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 외적을 방비하고자 각급 군관의 지휘 아래 군사를 주둔시키거나 혹은 그러한 목적으로 축조된 방어시설 중 내륙의 산성을 제외한 성보들은 모아 진보라는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수 석보의 성곽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이는데,「목책으로 진흙을 바른 성(木柵途泥城)이며, 둘레는 143보」라 하였다. 여수지역에 석보가 들어서는 단초로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존재가 조선 초기 순천도호부에 위치하였다는 소위 ‘목책도니성’이다. 이 성은 현전하는 자료에 의한 석보가 등장하기 이전 여수시의 성보시설로서 기록에 전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공식기록에서 여수를 관장한 성보로는 목책도니성이 최초이며, 바로 그 뒤를 이어 석보가 등장한다. 목책도니성은 변방의 연안지역처럼 별다른 방어시설이 없는 마을의 주민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쌓은 보루였다. 『세종실록』97 (세종24년 8월4일 신유)의 기록에 따르면, 읍성과 멀리 떨어져 방어에 취약한 바닷가 촌락에다 지역별 실정에 맞추어 ‘목책이나 석보 혹은 토축’을 마련함으로써 왜적의 급작스런 출현과 노략질에 대비토록 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수 석보는 둘레가 1,479척이고, 높이는 10척 이내이며 3개의 우물이 있다」고 서술되었다. 여기서 석보란 『여지지』에 기술되어 있는바 석성이며, 여수 석보란 순천부 동쪽 60여리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과거의 여수현이다. 따라서 성곽이 세종 때는 목책이었는데, 성종 때는 석성이었다는 것으로서, 현재의 석성은 세종대에서 성종대 사이에 쌓아진 것으로 보여 진다. 여수 석보의 존재를 알리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세조 3년(1457)이다. 『세조실록』6 (세조3년 정월 16일 신사) 하삼도의 여러 가지 진포를 몸소 살핀 도순찰사 등이 보고한 조목들 가운데 – 전라도 순천 돌산포의 경우 그 동쪽에 내례가 있고, 북쪽에 여수 석보가 있는데다 바다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서 방어에도 긴요하지를 않으니, 이제 돌산포를 혁파하고 그 선군은 내례와 여도에 나눠 소속시키도록 하소서 – 에 나오는 여수 석보가 그것이다. 성종 10년(1497) 내례포에 전라좌수영을 설치하면서 16세기부터 석보창(창고)으로 기능이 변하고, 난중일기에도 석보창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여수석보는 유일하게 해안으로만 접근이 가능했고, 이를 이용해 조선 중기에는 군수물자를 제작하고,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이 되었다. 여수석보 밖에 생긴 석보촌이라는 곳은 전국에서 모여든 장인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건설한 화치 첨산에서 삼간도 애양원 쪽으로 건설된 긴 방축인 십리방천 때문에 바닷가에 있었던 여수석보의 주변은 벌판이 되었다. 여수석보는 한 변이 170m내외이고, 전체 둘레가 703m내외의 소규모의 평지 방향의 성이다. 몇 년 전까지 여수석보의 동문지 북쪽과 동쪽의 성벽에는 여러 채의 민가와 서남쪽 모퉁이지역의 성곽 상단에도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외 석보로의 주 접근로지역인 동문지 밖에도 여러 채의 민가가 있었다. 또한 석보 내에는 서쪽 성벽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밭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석보의 외부는 논으로 활용되어 잔존유구의 일부가 훼손되기도 하였다. 여수석보는 여수석보성, 석창성, 장시 등으로 변화를 거듭한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시에서는 그간 유적의 보존과 정비를 위해 적극적으로 사유지를 매입하였고, 여수석보의 정비를 위한 지표 및 발굴조사를 지금까지 총3차례 실시하였다. 2003년 대학교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등 3개의 조사기관이 성곽,해자,성내부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성벽을 비롯한 동·남문지 및 해자와 건물지 3동과 집석유구 2개소 등이 조사되었다. 2007년 서쪽지역을 중심으로 서벽과 수구,해자,건물지,우물,연못지 등이 조사되었다. 2014년부터 시작된 3차 조사에서는 중앙중심부와 나머지 부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26기의 주거지 유적 및 유물들이 조사되었다. 여수석보는 성벽과 성문 그리고 성내의 각종 건물지와 외부의 해자와 성내의 주거지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고, 현재는 유적성격의 파악이 가능한 정도로 조사가 이루어진 상태다. 특히 여수석보의 주요시설인 성벽을 비롯한 성문지, 그리고 성내 건물지 등은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유적전체가 뚜렷이 확인되는 정도로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어 다른 성곽에 비해 여전히 양호하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下) 다음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