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2021년 전남문학상 시상식 열려, 임호상 시인 외 수상-시부문에 김남현, 김영천, 임호상 시인 수상, 수필부문에 장여옥 수필가가 각각 수상 영예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제44회 전남문학상 시상식이 여수시 청소년해양교육원에서 개최되어 시부문에 김남현, 김영천, 임호상 시인이 수상하였으며, 수필부문에 장여옥 수필가가 각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바이올린니스트 이은주 유진오케스트라 단장과 허윤정 재즈보컬리스트의 축하공연으로 시작한 시상식에는 전남문인협회 김용국 회장님의 인사말에 이어 전남문학상 심사경위 발표, 수상자 약력소개와 함께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 임호상 시인 전남문협 여수지부장을 역임했으며 시 <조금새끼로 운다>외 다수의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 임호상 시인은 수상의 기쁨도 크지만 전남문학상 수상자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더욱 창작 활동에 전념하겠다며 쉐프의 음식이 맛있어야하듯 시인의 시도 자꾸 생각나도록 감칠맛 나는 시를 쓰겠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또한 전남지역의 문학 지망생을 대상으로 해마다 각 문학 장르 별로 작품 공모를 하여,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는 전남문협 지상백일장에는 시 부문 장원 김은숙, 수필 부문 장원 유소희 등 13명이 수상 하였다. 송영선 기자
-
여수 섬 탐방 - 남녘 어부들이 개척한 뱃길의 역사남녘 어부들이 개척한 뱃길의 역사 임병식수필가 에헤야 술비야/어기영차 뱃길이야 울고 간다 울릉도야/알고 간다 아랫녘아 (중략 ) 돛을 달고 노니다가/울릉도로 향해 가면고향 생각 간절하다 울릉도를 가서 보면/에헤야 술비야좋은 나무 탐진 미역/구석구석 가득 찼네(이하생략). 이 노래는 오래토록 거문도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노동요(勞動謠) 술비소리다. 힘차면서 역동적인 소리다. 이 소리는 어부들이 협동하여 어로작업을 하면서 불렀던 노랫소리다. 지금은 예전과는 달리 많이 시들해 졌지만 이 노래는 지금도 축제 현장에서 재현되어 이어져 오고 있다. 이 노래는 그물을 손질하거나, 고기를 잡아 올릴 때, 노를 지으면서 불러진 노래지만 가사를 음미하노라면 이 지역 뱃사람들의 애환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예전에 멀리 울릉도와 독도까지 나아가 뱃길을 열고 어장을 개척했던 것이다. 그래서 진취적인 기상이 가득하다. 이 노랫말에 담긴 내용처럼 일찍이 거문도와 초도 사람들은 눈길을 멀리 돌렸다. 남녘 바다에만 한정해 살지 않고 멀리까지 나아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개척한 어장이 울릉도와 독도어장이었다. 그곳에서 고기도 잡고 좋은 목재를 구하여 실어 왔던 것이다. 동력선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그 먼 곳까지 진출했을까. 생각만 해도 놀랍기만 하다. 그때는 풍선배로 돛을 달고 노를 저어가던 때가 아닌가. 오직 근력으로서 도전정신을 발휘하지 않으면 아니 되던 때다. 그런 상황에서 망망대해를 누빈 것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풍향을 잘 읽고 항해술이 뛰어났던 것일까. 당시의 놀라운 항해술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거문도 초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항해술이 뛰어났다. 바다의 조류를 읽고 풍향을 예측했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손죽도와 거문도 사이의 바다가 워낙 거칠어 그 풍랑을 이겨내자면 생존전략을 터득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결국은 대단한 노하우가 된 것이다. 그런 단련이 자연스레 독자적인 항해술로 발전하고 진취성을 키우게 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울릉도와 독도를 드나든 물증은 지금도 초도마을에 남아있다. 1880경 지어진 어느 고가의 마룻장은 여느 나무와는 달리 두터운 판목으로 짜여져 있는 것이다. 인근에는 그만한 목재가 나는 곳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어디서 실어왔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울릉도에서 가져온 목재인 것이다. 또 다른 증거로는 독도(獨島)라고 불리는 지명을 들 수 있다. 전라도에서는 보통 돌덩이를 보고 ‘독’이라고 하는데 독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바로 ‘돌섬’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지금은 홀로 독(獨)자를 쓰지만 이 섬이 돌덩어리 섬인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아무튼, 먼 뱃길을 개척한 역사는 흥미롭기만 하다. 그 먼 곳까지 가는 데는 많은 것들을 고려했을 것이다. 겨울철은 샛바람이나 높새바람이 불어오므로 바람을 맞서게 되는 그 시기는 철저히 피하고, 하늬바람이나 마파람이 부는 봄철에 떠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항해 코스도 지금 많이 이용하는 손죽도와 소리도를 거쳐, 욕지도와 부산의 절영도를 통해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울릉도와 독도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더욱 해산물이 풍부했을 것이다. 특히 울릉도는 수목도 울창하여 질 좋은 목재도 마음껏 가져올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고기잡이뿐 아니라 나무를 실어오는데도 힘을 써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때 향나무도 함께 베어왔는데 이것은 제수로 귀한 대접을 받아 몇 배 이문을 남겼다고 한다. 문헌에 보면 조선은 수 세기 동안 섬을 비워 두는 공도(空島)정책을 폈다. 태종 시대 이래로 왜구의 침탈을 막고 군역을 피하거나 죄를 짓고 숨어드는 자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 어간을 이용하여 거문도 어부들이 이 어장을 개척한 것이다. 그 어간에 일본은 노략질을 그치지 않았다. 자국에서 인기가 있던 강치(바다사자)를 모조리 남획해 갔다. 당시 일본에서 강치는 대단한 인기 품목이어서 가격이 무척 비쌌다. 강치 한 마리 값이 무려 소 열 마리 값에 이르렀다. 소가 15엔일 때 강치는 무려 200엔을 호가했다. 그 바람에 잡아간 강치의 숫자가 자그마치 일만 사천여 마리나 되었다. 자료에 나와 있는 숫자이다이처럼 매력적인 어장이었는데 어찌 욕심을 내지 않겠는가. 마침 그들은 기회를 잡았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동해를 장악하고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일련의 행위가 1905년 독도를 시마네 현에 편입시키고 다께시마라 명명하여 영유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하나 이것은 명백한 침범이다. 그들이 둘러대기를 조선의 공도(空島)정책도 스스로 자국 땅이 아님을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지만, 이는 어처구니없는 괴변이다. 술비소리가 어장을 개척하고 관리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어부들이 꾸준히 지켜온 터전임을 노래가사는 여실히 담아 두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볼 때 거문도와 초도 어부들이 개척한 바다의 역사는 의미가 남다르지 않는가 한다. 돌이켜보면 거문도는 특이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구 한 말,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펴며 해양을 지배하려 들자 영국은 지체없이 동양 함대를 이 섬에 출동시켰던 것이다. 그 후로 일제 강점기에는 그들의 어업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섬에는 자랑스런 개척의 역사가 간직되어 있다. 이런 자료 하나하나를 잘 갈무리한다면 그들이 억지를 부리는 독도문제도 반박의 논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면면히 이어온 노동요와 당시 독도와 울릉도에서 가져온 것들이 역사의 사료가 될 것임으로.
-
손죽도(巽竹島) 생각-손죽도 앞바다 지키다가 손가락 끊어서 옷에 절명시를 쓴 소년장수 이대원-국가방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하는 아픈 역사의 현장 >임병식 수필가 손죽도(巽竹島)는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는 섬이다. 손괘손(巽)자는 신에게 제사지내는 형상을 형상화한 글자인데 바람을 의미하며 유순하다, 사양하다, 공손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거기다가 대나무(竹)자가 들어있으니, 역설적으로 바람이 잔잔하기를 염원하여 지어진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 섬은 평온하거나 잔잔하지 않았다. 역사의 굽이굽이에 아픔이 새겨진 섬이다. 손죽도를 생각하면 우선 역사적인 한 인물의 발자취가 떠오른다. 바로 소년장수 이대원 장군이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 이곳 손죽도 앞바다를 지키다가 전사를 했다. 젋디 젊은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였다. 알려진 바로 그의 전사는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심암과 관계가 깊다. 그가 아군 백여명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적장을 생포할 때 전라좌수사는 꽁무니만 빼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과를 가로채려 하자 장군은 단호히 거절했다. 적은 다시 칩입해 왔다. 이때는 중과부적이어서 좌수사에게 긴급히 지원을 요쳥 했으나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전일의 일로 사감을 앞세운 때문이었다. 이것을 안 조정에서는 장군을 후임 좌수사에 임명코자 했으니 그때는 이미 돌아가신 때였다.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손죽도는 여수와 거문도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섬은 비록 작지만 한 가운데는 대촌을 이룬 가옥이 빼곡하고 여기서 사는 주민들은 평화롭게 반농 반어업에 종사하고 산다. 이 섬은 여수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첫 번째로 닿는 기항지면서 면소재지가 있는 거문도에서 볼 때는 한 면의 끄트머리에 해당한다. 가까이로는 소거문도와 평도, 광도가 있다. 나는 직장생활 초기에 이 섬을 담당했다. 전경대 순환근무를 마치고 첫번째 부임하여 담당한 곳이었다. 당시 나는 업무를 보려고 이 섬을 오가며 어렴풋이 이 섬이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장수의 묘가 있다고 들었고 그가 왜적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정년퇴임을 하고나서 고장에 거주하고 살면서 주변의 역사 유물을 찾아보다가 이대원 장군의 흔적을 더듬어 보게 되었다. 기록에 보면 장군은 18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21세에 녹도만호에 제수된 것으로 나온다. 지금의 행정구역은 여수시 삼산명이지만 옛날에는 흥양군(지금의 고흥군)에 속했다. 장군은 선조 때인 1587년 2월 10일 정해왜변이 일어나자 출동했다. 단번에 왜선 20여척를 물리치고 승리했다. 그런데 왜적은 패전 일주일 후 또다시 재침입을 해 왔다. 이때 장군은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붙잡혀서 죽임을 당했다. 그 주검은 처참했다. 왜적은 장군을 효수하여 깃대에다 내걸었던 것이다. 죽음 직전에 쓴 장군의 시가 한편 전해온다. 日暮轅門 渡海來 (일모원문 도해래)兵孤勢乏 此生哀 (병고세핍 차생애)君親思義 俱無報 (군친사의 구무보)恨入愁雲結不開 (한입수운 결부개) 해저무는 진중에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 군사는 외로운 힘이 없어 죽으니 슬프도다임금님과 부모님께 충효를 보답하지 못하니 한스러움과 먹구름이 얽혀 끝내 풀길이 없네. 바로 직전의 상황이다. 충무공 기록이 전하는 '진중일기'에 보면 이대원 장군은 왜구가 침입하자 출전했다. 두 번째 출전은 심수사가 지원군을 보내주지 않는 가운데 외롭게 나아갔다. 사실상 사지로 내몬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군은 이때 죽음을 예감했는지 손가락을 끊어서 옷에 절명시를 써서 하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오늘날 알려지고 있는 절명시다. 이 섬의 초기 지명은 장군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손대도(損大島)라 했는데 이것은 대장을 잃은 섬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나중에 순죽도로 바뀐 것이라 한다. 그 이후 윗선에 있던 사람으로 전라좌수사 심암뿐 아니라 전주부윤 남언경은 지원을 요청받고도 눈감아 버렸다고 한다.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한데 이 손죽도사건을 더듬어 보면서 강한 회의가 드는 것이 있다. 바로 이대원 장군이 전사한 후, 1590년에는 일본 풍신수길이 열도를 통일하고 전쟁기운이 감돌던 때인데 왜 그토록 방비를 소홀히 하고 지냈느냐는 하는 것이다. 더구나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의견이 각각 다르긴 했으나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일에는 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도대체 당파가 나라 보존하는 일보다 급하고 소중했을까. 손죽도 사건을 떠올리면 그 후로 이어진 조선의 역사가 영.정조 시대를 빼고는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음을 생각하면 임금의 무능과 위정자들의 안일무사가 얼마나 비극을 낳게 하는지를 엿보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손죽도는 내 한 개인의 추억이 어린 곳이면서 한편으로는 국가방위를 챙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뼈저리게 하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가만히 날개를 펴듯 대해에 떠있는 섬을 생각해 본다. 면적 3.10 평방키로미터에 세대수 150. 그리고 인구 747명이 오순도순 살고 있는 섬(1980기준). 손죽도는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섬이다.
-
신병은의 문화예술칼럼지역예술문화의 자원화를 위한 전제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오스틴의 성장비결은 사람을 끌어당길 만큼의 매력적이고 훌륭한 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오스틴패션위크, 시낭송을 위한 오스틴포이트리 슬램(Austin Poetry Slam), 아트페어, 라이브음악 창작공간 등의 문화적 환경 조성 등 선진 문화생태 도시로 자리하고 있다. 결과 오스틴의 창조경제는 활력이 넘치며 경기침체 기간에도 2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오스틴 문화코드인 음악, 예술, 창의성, 호기심이 창조경제의 비결이라 했다.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웍에서 미디어아트분야 창의 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시, 공연, 문학, 디자인, 요리,... 이 모든 것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리고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며 , 즐거움을 주며, 영혼을 풍요롭게 해줄 뿐만아니라, 역사와 유산에 관심을 끌게 해주고.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역할을 한다.문화예술이 지닌 가치창조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최우선 과제는 교육, 음식, 건강, 주택, 교통이지만 문화예술은 이러한 요소 하나하나와 통합되어야 한다. 문화예술은 그 도시의 시책목록이 아니라 시민의 삶과 삶의 질과 관계된 모든 요소에 통합되어 있어야 한다. 문화예술은 지식경제로 전환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도시의 미래경제를 준비하고 시민들을 통합하는 핵심적인 요소다.2014년 지역문화진흥법이 제정되었고, 그에 따른 시행령도 2016년에 제정되어 지역실정에 맞게 지역문화진흥을 위한 시행계획을 5년마다 수립, 시행, 평가하게 되었다.그에 맞춰 2016년 9월에 우리시도 문화예술비전 5개년계획도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다. 추진이 곧 자원화다. Ⅰ. 예술문화의 자원화를 위한 키워드 정확한 예측을 위한 몇 가지 키워드와 발문이 지역문화예술의 비전을 제시하는 담론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역예술문화의 비전이란 말과 함께 두서없이 떠 오른 생각을 나열해 보면 얼핏 다음과 같다. ☞ 예술문화로 행복한 지역문화융성☞ 도시생존전략 비전으로써의 문화예술☞ 지역을 재발견하는 장으로써의 문화예술☞ 문화예술의 브랜드화☞ 함께 누리는 문화예술의 발효법, 문화예술의 사회적 공헌☞ 뮤지컬, 오페라, 전시회를 위한 메세나운동 전개☞ 문화사랑방 운영 ☞ 비전in여수, 반성과 전망을 위한 심포지엄개최 ☞ 큰 예술인 키우기 프로젝트 예술영재, 지역예술인 재발견 및 재평가☞ 전통예술의 발굴 및 창조적 계승☞ 섬문화의 발굴과 수집 스토리텔링☞ 여수의 노래 고려가요 ‘동동’의 문학비 건립 및 북축제☞ 신화, 전설, 민담의 재발견과 스토리텔링 및 문화콘텐츠화 ☞ 지역문화 창조 플랫폼 구축(공간, 인력, 콘텐츠의 만남) Ⅱ. 지역문화예술의 현주소 문화예술은 창조도시의 키워드이고 도시생태빈도측정의 기준척도가 되고 있다. 살아 숨 쉬는 도시는 무엇보다 문화예술이 살아있는 도시다.우리 여수의 성공케이스를 보면 ‘여수밤바다 낭만버스킹’의 추진이다. 이 사업은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여수밤바다’라는 노래 한곡에서 출발한다. 문화예술의 현재가 그 도시의 현주소가 되고 문화예술비전이 결국 지역의 비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화예술의 비전은 통섭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단일 항목 하나만 볼 것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 시민의 삶의 성숙등과 통합적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 여수시 공연 및 전시관 현황 가. 공연시설 : 예울마루, 시민회관, 진남문예회관, 여수문화홀, 엑스포홀, 전남학생교육문화회관 공연장, 나. 전시시설 : 예울마루 전시실, 예술의 섬 장도 전시실, 진남문예회관 전시실, 엑스포 아트갤러리, 달빛갤러리, 전남대국동 아트센터, 전남학생문화회관 전시실 다. 사설전시실 : 여수미술관, 노마드갤러리, 아르불르갤러리 다. 기타 야외공연장 이순신광장, 종포해양공원, 여수밤바다 버스킹무대, 소호동동다리, 거북선공원, 이순신 공원, 국동수변공원, 웅천친수공원, 세계박람회장, 성산공원, 미관광장, 오동도공연장 등 # 여수시문화예술 예산 - 우리시 예산대비 1.66% 2017년 20,401백만원, 2018년 20,271백만원, 2019년 28,578백만원 # 여수문화예술 단체 및 주요인물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여수지회, 민족예술인총연합여수지부, 여수문화원. 문학 : 한국문인협회여수지부, 민예총문학위원회, 한국작가회여수지부, 갈무리문학회, 여수수필문학회, 화요문학회, 박기동, 김정수, 박보운, 여지랑, 김자환, 김종안, 이성관, 임병식 미술 : 한국미술협회여수지부, 민족미술인협회여수지부, 토상회, 여수청년미술작가회, 여수여성작가회, 물화우회, 여주회, 중앙미전, 여수미술사랑협동조합 김홍식, 배동신, 유경채, 손상기, 허영만. 고행석, 백무현, 신승우, 임영기, 정우종, 강종래, 강종열사진 : 한국사진작가협회여수지부, 민예총사진위원회, 프로사진작가협회 , 빛사랑, 포커스, 여수디카동우회 배병우, 민병태, 신근호, 장기철, 한창호 국악 : 시립국악단, 한국국악협회여수지부, 민예총국악위원회 정홍수, 김향순음악 : 시립합창단, 한국음악협회여수지부, 민예총음악위원회, 합창단 30여 팀 장정익, 김용호, 김갑, 지정익, 김순신, 김소진, 문지영, 이성열, 강병원연극 : 한국연극협회여수지부, 민예총극위원회, 극단 파도소리 박노식, 백일섭, 곽진영, 지성, 도희, 김아라, 장유정 연예 : 한국연예예술인협회여수지부, 연예예술단, 한국가수협회여수지부 주병선, 김미려, 현아 # 여수의 문화예술 자원화를 위한 과제 ☞ 설화의 스토리텔링 전설- 오동도 전설, 용굴전설, 향일암, 종고산(무음산), 호암산 범바위 등 66편 민담- 소금장사이야기, 방구쟁이 며느리, 귀뚝새와 두견새 등 28편☞ 고려가요 <동동><장승포곡>의 재현 및 축제화(노래비 건립)☞ 역사 속 문화예술인 조명 이수광, 이덕형, 이순신, 김유, 김윤식, 오형묵 ☞ 승전문화의 재발견 및 창조적 계승 진해루장수회의 둑제 군점 수군출정식 승전무(강강술래)☞ 전통문화예술 재정립 현천소동패놀이, 거문도뱃노래, 상문살굿, 영당풍어굿, 둑제, 용천제☞ 오페라 ‘귀항’ 전통가무악국 ‘오돌래’ 격년제 공연☞ 손상기, 김홍식, 배동신 상설관을 함께 갖춘 여수시립미술관 건립☞ 버스커의 도시를 위한 버스커학교 및 창작공간 확충☞ 버스커 버스커의 노랫말에 나온 밤바다의 고요와 적막이 감도는 원형성 복원과 여수밤바다의 명품화를 위한 터닝포인터 마련 (시민참여형 프로그램 개발적용) ☞ 박기동, 김정수, 박보운 등 문인들의 기념관을 갖춘 여수문학관 건립☞ 지역문화예술인 재평가 및 조명 이밖에 여수와 관계있는 문화예술인, 혹은 관련 자료 활용한다. 즉 김훈의 칼의 노래, 한강의 여수의 사랑, 정희성시인 등의 소설과 시를 활용한 콘텐츠 개발도 필요할 것이다. <시로 읽는 여수> <여수, 섬에 물들다> 등의 시집처럼 <여수의 풍경> 사진 정리, 대중가요정리 등이 필요하다. 우리 여수는 이렇게 많은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그 자원을 활용하는 콘텐츠개발은 미약하기 그지없다. 김홍식, 배동신, 손상기 등 한국서양화 1세대인인 고향이면서 아직 변변한 전시관 하나 갖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국내 최고의 문화예술센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예울마루와 예술의 섬 장도가 개관함으로서 지역문화예술의 위상과 자존을 챙기고 있지만, 시립미술관과 문학관 건립을 위한 고민이 하루속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렵다면 작은 미술관, 작은 문학관도 만드는 것 또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은 대형 공간보다는 작은 문화공간, 쌈지문화공간이 대세다. 크게 만들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것 보다는 도심 곳곳에 작으면서 알찬 문화공간 연출이 필요하다. # 쌈지문화 공간의 확충 우리는 공간 그 자체가 생각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공간의 개념이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이전의 미술관, 공연장이 아니라 골목으로, 광장으로, 지하철로, 거리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춤과 연극이 지하철로 광장으로 나가고, 미술관이 거리로 골목으로 나가고 있는 추세다. 좀 더 삶의 현장 가까이 가고자 하는 것이다.그래서 쌈지문화공간의 확충이 대세다.접근성이 좋은 쌈지공간은 대다수 시민들이 누릴 수 있는 생활공간 속의 예술 공간이다. 없는 것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기존한 공간을 재구성하고 편집하여 새로운 공간을 모색하는 일이다. ☞ 예술의 섬 장도 명품화 숨어있는 그림 찾기 이벤트☞ 골목갤러리, 뻔뻔한 갤러리, 동화가 있는 갤러리, ☞ 달빛갤러리와 같은 공간연출☞ 소장품 전시(김탁경, 유동명 등)☞ 아파트 101동 101호 갤러리화☞ 시청로비 등 공공기관의 복합예술공간으로 연출 ☞ 시가 있는 장독대 조성☞ 형설책방, 선미당 등을 활용한 문화프리마켓 #. 지역예술인의 재발견 및 재평가 예술의 성장은 알고 보면 재발견의 힘이다.재발견은 없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어떻게 다르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면서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다.여기에는 출향예술인의 재발견, 지역예술인 재발견, 그리고 문화컨텐츠의 재발견이 해당된다.출향예술인 재발견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홍식, 허영만, 배동신, 손상기, 김정수 등의 예술인에 대한 재발견은 많이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가 하나 둘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역예술인의 재발견, 재평가가 하루속히 이루어져야한다.어려운 여건 속에서 묵묵히 한평생을 바쳐 지역예술문화의 중심에서 그 역할을 해온 예술인에 대한 재평가 필요하다. 우리지역 예술인의 현주소를 파악하여 제대로 자리매김해 두는 것이 알고 보면 우리시의 성장을 위한 소중한 인적 자산이기 때문이다.우리지역에서 활동하시다 작고하신 예술인과 현재 활동하고 있는 예술인 중에서 자리매김 이 되어야 할 분들이 많다.이 분들에 대한 평가와 지원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여수와 관계하고 있는 문화예술인, 혹은 관련 컨텐츠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언젠가 ‘문학 속의 여수’를 정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나라 유명 시, 소설에 여수가 들어있다는 것에 놀랐다. 신석정 시, 김동리 소설 ‘역마’, 김훈의 칼의 노래, 한강의 여수의 사랑, 정희성, 고은, 유안진, 신달자, 이생진 시인 등의 소설과 시를 활용한 콘텐츠 개발도 필요할 있다.아울러 예술영재를 발굴하여 육성 지원하는 사업도 중요하다.피카소는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로 태어난다’고 했다.현대는 지역의 인물은 지역에서 만들어가는 시대다. 그 실례로 피아니스트 문지영이다. 우리시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문지영을 만들어낸 것이다. 문인협회가 기업과의 협업으로 매년 여수청소년 문학상을 제정 운영하고 있다. 작년의 경우 시와 소설 부문에서 공모하여 수상자 16명에게 시, 소설 대상 각각 100만원을 비롯해 600만원의 장학금이 주어졌는데, 놀라운 사실은 지역에 이처럼 우수한 문학인재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문학뿐만이 아니라 청소년음악상, 청소년국악상, 청소년미술상, 청소년 연극상, 청소년 무용상 등 전분야로 확대하여 시행하여 영재를 발굴하고 지원해야 한다. Ⅲ. 마무리 이제 문화예술도 복지개념으로 접근해야한다.소외계층에 대한 복지도 중요하지만, 대다수 시민을 위한 문화복지를 챙기는 것이 ‘행복한 시민’을 구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예술복지와 예술인복지 진정성은 소비가 아니 창조며 생산유발 및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중요한 요소다. 문화예술은 도시의 미래경제를 준비하고 시민들을 통합하는 핵심적인 요소다.결국 오늘날 도시가 추구하는 과제는 문화로 행복한 삶이다오늘날 문화예술의 가치요소는 ‘행복한 삶의 선순환’이다. 여수의 문화예술은 여수의 삶을 행복하게 한다. 결국 문화예술은 그 도시의 시책목록이 아니라, 시민의 삶과 삶의 질과 관계된 모든 요소에 통합되어 있다. 단일 항목 하나만 볼 것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 시민의 삶의 성숙 등과 함께 하는 통합적 안목으로 바라볼 때 문화예술의 자원화를 위한 미래예측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병은 시인
-
<우리지역 탐방> - 거문도 회상-나를 그립게 만드는 섬 임병식 수필가 나는 거문도를 생각하면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그대가 ?옆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는 말. 이 말을 생각하면 얼마나 그리움이 사무치는 것인가. 거문도는 정말이지 나를 그립게 만드는 섬이 아닌가 한다. 아름다운 풍광 못지않게 늘 그리움과 안타까움과 환희와 절망이 함께 뒤엉켜 혼재 하는 인상 때문일까. 거문도는 육지로 부터 무려 134.7km나 떨어져 있는 섬이다. 형상은 세 개의 섬이 마치 소쿠리 형태로 어깨동무를 하듯이 감싸고 있다. 그런지라 제아무리 풍파가 거세도 끄떡없는 천혜의 포구를 자랑한다. 이 섬은 조업하는 선박들의 대피장소이면서 선원들의 휴식처이다. 풍랑주의보나 태풍경보가 내리면 국내 선박뿐 아니라 인근을 지나는 타국적의 배들이 예외 없이 몰려든다. 섬의 모양은 본도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섬이 무려 33개나 아우러져 있다. 그런 만큼 바다에 떠있는 진주와도 같은 풍광을 자랑한다.통상 섬은 한자로 도서(島嶼)로 표기한다. 도(島)도 섬도자이고, 서(嶼)도 섬서자이니 각각 따로 부를 법도 하지만 외자로 떼어서 부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옛 문헌에 보면 ‘도’와 ‘서’는 엄연히 다르게 나와 있다. 즉, 도(島)는 해중유릉가거(海中有陵可居)라 하여 사람이 사는 것을 일컫고, 서(嶼)는 재수위(在水爲) 혹은 (재릉위(在陵爲)라고 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이른다. 아무튼 이 외딴 섬 거문도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세게 열강의 입김에 시달려왔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근대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맞서 영국군이 진주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거문도는 그 지명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은 19세기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이 섬에 와서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음을 보고 ‘문장가가 많다’는 뜻으로 <巨文>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섬은 또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다. 영국군은 23개월여를 주둔하면서 포트 헤밀턴( PORT HANILTON) 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 흔적을 남겼다. 이때 죽은 병사를 이곳에 묻고 묘비를 세웠다. 이 섬에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설치된 유물이 하나 더 남아 있다. 뭐냐하면 서도 수월산에 있는 등대로 1905년에 세워진 것이다. 이 등대는 우리나라 등대역사로 볼 때 인천 팔미도 등대에 이어 두 번 째로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세운 목적은 일제가 배를 이용해 수탈할 목적으로 방향잡이용으로 세운 것이다. 이렇듯 거문도는 우리의 영토이면서도 늘 외떨어져 있어 외세에 시달려온 아픈 역사를 간직한 것이다. 나는 1971년 발령을 받아 이 섬에 부임했다. 그런데 부임하고 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구사하는 사투리는 물론 생활의 패턴이 내가 자란 곳과 많이 달랐다. 밀물과 썰물, 조금과 시라, 여객선 입항과 출항에 따라 모든 생활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의 행동은 일사불란하기만 했다.한데도,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마주친 풍광이 아름다워서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꺼풀 속살을 비집고 들어가면 침략의 흔적이 오롯이 나타났다. 다음은 그런 느낌을 받고 써본 자작시이다. 거문도에 가면 외세가 훓고간 바람이 분다.1905년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등대,누가 불러들이지도 않았는데도 군인들이 몰려와 숨져간 흔적이 남아 있다그리고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백도는 지금도 그 상처에 자지러져 아파 한다 하지만 나중의 이런 마음과는 달리 처음 대해본 거문도의 비경은 실로 일품이었다. 마치 풍광이 그림 같고 드러내는 모습들은 이국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첫날부터 혹독한 신고식은 치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타고오던 삼산호가 어찌나 거친 파도에 요동을 치든지 반 주검이 되고 말았었다. 손죽도와 초도사이는 예로부터 악명이 높아 극심한 삼각파도가 배전을 강타라도 하면 좌우상하로 흔들려서 생지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바람에 승객들은 체면불고하고 서로 뒤엉켜 비명을 지르지 나뒹굴어 졌다. 그러니 한 마디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거문도에 도착하니 언제 그랬느냐 싶게 바람은 잦아들고 파도는 잔잔했다. 다만 항내에 가득 찬 선박들만이 태풍의 전조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발이 묶인 배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서 도선을 이용하지 않고도 이웃 섬을 건너뛰어 갈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거문도에 와서 진정으로 절경을 실감한 건 백도이다. 관광객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에 나는 그곳을 둘러볼 기회를 얻었었다. 그 황홀한 아름다운 절경이라니... 그 감동은 이어지는 후반부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꼭꼭 싸매서 숨겨둔 섬백도는 범접하기 어려운 신이 노니는 섬.그 기기묘묘한 수직절리 타고 오를 자는진정 없으리. 한데 그때가 언제인가 . 내가 거문도에서 새 출발의 첫발을 내디 딘 지도 벌써 수 십 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모습도 많이 변했다.삼도로 나뉘어 있던 섬은 다리가 놓여 연결되었고, 옛 등대는 수명을 다하고 유물로 남겨졌다. 그리고 백도에는 찾아오는 관람객으로 넘쳐난다. 하지만 나는 거문도를 떠올리면 조금은 아쉬움이 있다. 도로를 낸답시고 옛 소롯길을 훼손하고 말았는데, 그 바람에 옛길이 사라져 버려서다. 예전의 그 길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덕촌에서 변촌을 지나 서도로 이어지는 그 아름다운 벼룻길은 너무나 아름다워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픔을 모르게 만들었다. 그 아름다운 숲길, 수줍게 피어난 동백꽃이 이마에 나직하게 닿던 정겨움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안타까움에 오랜 세월 지났지만 '아, 옛날이여'하는 아쉬운 생각이 절로 난다.
-
<우리지역 탐방>-임병식수필가고락산성(鼓樂山城) 답사기 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는 유서깊은 고성(古城)이 하나 있다. 고락산성(鼓樂山城)으로 백제시대에 축성된 성이다. 이것이 한동안은 거의 다 허물어져 방치상태에 있었다. 내가 처음 그것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지금으로부터 40년도 훨씬 전이다. 그때 산에 올라 보니 산성은 폐성(廢城)밑돌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었다. 겨우 그것이 산성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러다가 20여년 후 다시 오르니 이때는 산성을 잘 정비하여 원형의 모습을 갖춰놓고 있었다. 보는 순간 반가웠다. 잊힐 뻔 한 역사를 복원해 놓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몰랐다. 사실 이 고락산성은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주변에서는 가장 오래된 성이면서 중요한 방어진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특별한 전투기록은 없지만 인근 순천 왜성에서 고니시가 머물고 있을 때 검단산성에서 조명연합군이 대치하고 중국 진린 제독은 묘도 도독골에서, 이순신 장군은 율촌 장도에서 전투를 벌일 때, 이 성은 분명 후방 척후의 구실을 했을 것이다. 이 성은 2010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둘레는 354m, 보루의 둘레도 244m에 이른다. 성의 형태는 남쪽은 좁고 북쪽은 상대적으로 넓다. 나는 처음 허물어진 이 성을 보면서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떠올렸다. 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부역에 시달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데, 부역이라는 말은 지극히 조심해서 쓸 필요가 있다. 여기서 언급한 것은 부역(負役)인데, 이 말이 반역에 가담하는 부역(附逆)과 말이 같기 때문이다. 이 성은 높이로 따지면 해발 400미터 정도가 되나 매우 가팔라서 맨몸으로도 오르기가 숨이 찬다. 그런데 이런 곳까지 무거운 돌을 등에 지거나 밧줄로 끌어 올렸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나중에 산에 오른 나는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근자에 쌓은 것과 옛 돌은 차이가 났다. 옛날 놓인 바위는 고색이 창연했다. 그 밑돌을 보노라니 옛분들의 노역의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보기에 위험하기도 하려니와 큰 돌을 끌어 올릴 때는 무척 힘도 들었을 것 같다. 당시는 무슨 노임을 받은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가 집에서 먹을 것을 챙겨와 부역을 했을 것이다.이곳 성의 규모로 보아 병력은 적게 잡아도 수백 명, 중대병력이상을 수용했을 것 같다. 나는 성을 둘러보다가 어느 분이 쓴 들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여수에 출신 정종선(丁鐘璿 1811-1878)이란 선비가 올린 상소문이다. 그 상소문 중에는 당시 여수가 순천에 병합됨에 따라 얼마나 과도하게 세금과 부역을 부담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시 속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한 상소문인 것이다.이때는 어느 시기인가. 대략 순조 연간으로 그때는 거의 외침도 없던 때인데도 고을 백성들은 과도하게 부역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힘 있는 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고 힘없는 백성만이 온전히 과도한 부역을 떠맡고 있었다. 형편이 그 모양이니 나라의 기강이 온전히 바로 서겠는가. 그런 일단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쓴 <적성촌의 한 집을 지나며>라는 시를 보면 정황이 그려진다. 시의 일부다. (전략) 아침 점심 다 굶다가 밤에 와서 밥을 짓고/ 여름에는 갈옷 입고 겨울에는 베옷 입네/ 들 냉이 깊은 싹은 땅 녹기를 기다리고,/ 이웃집 술 익어야 지게미라도 얻어 먹겠네/ 지난 봄에 꾸어 먹은 환곡이 닷 말인데/ 이 때문에 금년은 정말 못살겠네(이하 생략) 피폐한 생활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다음은 정종선 선비의 상소문 일부이다. "(전략) 부역에 있어서 여수 백성들은 전라좌수영의 부역에다 순천 부역까지 나가니 한 몸으로 두 곳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한 집에 사오 명의 가족이 있다면 아버지는 수영의 부역에 나가고 아들은 순천 부역에 나가며 형은 수영 부역, 동생은 순천 부역에 나가야 하는데 그것도 어느 때에는 아침에는 수영 부역, 낮에는 순천 부역에 나가는 때가 있으니 한 몸에 두 지게를 져야 하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거리입니다.(이하생략)" 당시의 부역은 살아가는데도 힘든 마당이어서 지옥과 같았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 지역민들은 배를 부릴 줄 안다는 이유로 노 젓는 노역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동원이 되었을 테니 얼마나 고초가 많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석성을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부역에 시달린 민초들은 이 성을 쌓으며 나중 누가 기억해 주리라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성에 올라 지금은 한줌 흙과 바람으로 흝어진 그들의 영혼을 떠올리자니 그 흔적을 더듬는 일이 야릇하기만 하다. 이날 나는 이 고달픈 부역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그분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그 흔적을 기억하겠다는 는 의미로 조그만 돌 하나를성위에 놓아두고 발길을 돌렸다.
-
‘올 여름 휴가는 전남 섬 해수욕장에서’‘올 여름 휴가는 온가족 함께 전남의 섬 해수욕장에서 즐기세요.’ 전라남도가 올 여름 휴가계획으로 고민하는 도시인들을 위해 섬에서 나만의 감성여행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힐링 장소 20곳을 선정, ‘하마터면 못 갈뻔했다’ 홍보책자를 발간했다. 전남은 전국 3천300여 섬 가우데 2천165개가 은하수처럼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고 있는 다도해의 명소이자 섬의 1번지다. 매년 54개소의 해수욕장을 운영하고 있어 100만 명 이상의 이용객이 여름철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 찾는다. 특히 빼어난 해안, 바다풍광이 있는 섬 지역 해수욕장은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힐링 장소로 손색이 없다. ‘하마터면 못 갈뻔했다’는 아이들과 함께 오는 가족단위 이용객과 젊은 청년층을 겨냥해 제작한 맞춤형 책자다. 총 120여 쪽 분량으로 전남의 섬 안에 있는 20개 해수욕장을 소개하고 있다. 전국의 주요 관광안내소, 고속도로 휴게소 등 다중이 이용하는 곳에 비치할 계획이다. 책자에는 △낙조가 아름다워 연인들에게 인기 있는 외달도해수욕장 △다도해의 보석으로 불리는 거문도해수욕장 △섬 가운데 자연호가 형성돼 천혜의 선박 대피소로 활용되는 안도해수욕장 △몽돌로 꽉 채워져 독특한 해변경관이 있는 송이도해수욕장 △조용하고 평화롭다 해 평일도라 불리는 금일도 금일명사십리해수욕장 △걷기 여행자에게 필수 방문지가 된 청산도 지리․신흥해수욕장이 소개됐다. 또 △고산 윤선도의 자취가 묻어있는 보길도 중리·예송해수욕장 △미역과 다시마, 톳, 전복 등이 신선하고 품질 좋기로 유명한 생일도 금곡해수욕장 △전국 강태공들이 싱싱한 활어를 잡으러 찾아오는 하조도 신전해수욕장 △8경을 가진 뛰어난 경관의 섬, 관매도해수욕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넓은 백사장으로 유명한 임자도 대광해수욕장도 포함됐다. 이와함께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이 태어난 비금도의 원평·하트해수욕장 △국회의원, 판·검사 등 여러 방면의 인재를 배출한 도초도의 시목해수욕장 △모래산으로 유명한 우이도의 돈목해수욕장 △국토해양부가 선정한 한국의 우수해수욕장 15선에 뽑힐 만큼 아름다운 신도해수욕장 △섬의 절반이 염전으로 이뤄진 신의도의 황성금리해수욕장 △소작쟁의 항쟁 기념관이 있는 암태도의 추포해수욕장 정보도 실려 있다. 특히 이 책은 스쳐 읽고 버리는 일회성 홍보물 형식에서 벗어나 이야기가 담겨있는 일러스트 동화형식으로 꾸며졌다. 어린이들이 해수욕장에 대한 재미와 학습을 함께 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기존 홍보책자와 차별화했다. 주인공인 ‘해변이’가 전남 섬 해수욕장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풀어 해수욕장에 대한 정보를 안내하고 있다. 해수욕장에서 피서를 즐기면서 주변 섬 지역을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도록 유적지, 특산물, 가볼만 한 곳 등 다양한 정보를 담았다. 자녀에게는 동화책, 부모에게는 예쁜 수필집이 될 수 있어 책 자체로서 소장가치도 있다. 이상심 전라남도 섬해양정책과장은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휴식과 여유, 어머니 품 같은 포근함을 원한다면 올 여름, ‘해변이’를 따라 전남 섬 해수욕장으로 여행을 떠나보길 권한다”고 말했다.
-
수필-동백꽃-혹여 동백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 있다면.... 수필가 임병식 3월은 동백꽃의 계절이고 여수는 동백꽃의 고장이다. 여수에 사는 사람치고 동백나무와 동백꽃을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래도 혹여 동백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다음 소리를 연상하면 어떨까 싶다. 감나무에 매달린 감또개가 '뚝'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그 낙하음을 -. 만약 곱디고운 동백꽃이 별안간에 떨어지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적이 없는 사람은 그러한 정황을 연상해 보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혹자는 이렇듯 홀연히 지는 동백꽃을 두고 마지막까지 시들지 않고 뭉뚝 떨어지는 모습이 보기에 안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서 추한 모습으로 떨어지는 여느 꽃보다 얼마나 결연하며 장엄한가. 동백꽃은 이른 봄에 꽃이 핀다. 수종은 실록교목으로 차나무과에 속하며 이파리는 두텁다. 수정은 이른 봄에 피는 만큼 벌과 나비가 역할을 못한 대신 동박새가 한다. 꿀을 내어주는 대신 녀석에게 수정을 의탁한다. 동백꽃은 매력적인 꽃이다. 매화만큼이나 고고하며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 청순한 기개를 보여준다. 내가 이런 동백꽃을 많이 보게 된 것은 여수에 와서이다. 이른 봄 날 직장 따라 여수에 와서 보니 가장 인상적인 것이 동백꽃이었다. 시간을 내어 오동도를 들렸는데 아기자기한 동산이 온통 동백꽃의 천지였다. 절로 강한 인상이 박혀 버렸다. 그만큼 동백꽃은 여수를 상징하고 여수라면 어디서든 동백나무를 볼 수 있다. 개화시기도 한여름을 빼면 다양한 수종이 꽃을 피운다. 그러니 일부러 멀리 나가 발품 팔지 않아도 시 외곽을 조금만 벗어나면 쉽게 동백꽃을 만날 수 있다. 그런 동백꽃 중에는 오동도의 것이 일품이다. 여름 한철을 제외하고는 늘 꽃을 피우고 있어 찾아가면 언제든 반긴다. 나는 이런 동백 숲속이 좋아서 동백 숲을 거닐면서 자작시를 읊조리곤 한다. 오동도 동백꽃 붉은 동백꽃 /지아비 그리다 떨어져 죽은 자리에/ 혼령으로 피어난 서러운 넋아/ 네 피어 난 뜻 그 누군들 모르랴/ 푸른 잎 붉은 입술 차마 보기 애처러워 / 보는 사람마다 고개 떨구누나./ 옛날 옛적에 오동도에는 고기잡이 지아비와 한 아낙이 살고 있었단다. 그런데 남편이 고기를 잡이 나간 사이 도적떼가 침입 하여 여인을 덮치려고 했다. 그러자 여인은 얼른 벼랑 끝으로 몸을 숨겼다. 그래도 따라오자 아낙은 결심을 했다.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자고. 해서 아낙은 뛰어내렸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아하였다. 나중 고기잡이 나갔다 돌아온 남편은 시신을 수습하여 바위틈에 무덤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눈이 수북이 쌓인 무덤에서 동백나무가 자라났고 그 주위에는 푸른 신우대가 자라났다. 어디까지나 전설이지만 애절한 사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오동도 동백꽃은 해마다 유독 붉디붉은 동백꽃이 피어낸다. 마치,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사랑 할까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는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 내세의 만남을 기약하며 죽은 남편의 관속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미투리를 삼아 넣었던 안동의 오래된 무덤에서 발견된 여인의 편지처럼 그렇게 오동도의 동백꽃도 죽은 여인의 혼령인냥 해마다 애련하게 피어난다. 오동도의 동백꽃은 조금은 독특하다. 가령, 돌산 은적암(隱寂庵)의 동백이나 향일암의 꽃과는 달리 그 품위가 우월하다. 은적암의 꽃이 꽃술이 다문다문 피어 은근한 그리움을 자극한다면, 향일암의 동백꽃이 인파가 북적거리는 가운데 피어선지 정숙한 맛이 없다. 하지만 오동도 동백꽃은 여간 순결히 보이지 않다. 꽃술은 영롱하고 이 산"뜻하며 어떤 비장미를 보여준다. 결코 선운사 동백을 두고 서정주 시인이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와 같은 그런 분위가기 아니다. 천박하게 입술 짙게 화장한 그런 목로집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해풍을 맞고 피어서인지 청순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다. 해서 나는 종종 오동도를 찾는다. 피어있는 자태가 매혹적이어 서다. 나는 예전부터 동백꽃을 좋아했다. 그런 이유가 있다. 내륙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큰댁 마당에는 보기 드물게 수령이 백년도 넘은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동백나무는 겨울철만 되면 온 가지에 불을 켜듯 붉은 동백꽃이 피어냈다. 그게 좋아서 유년시절에는 나무 밑에 가서 이파리를 따 딱지치기를 하고, 떨어진 꽃송이를 주워 지푸라기에 꿰어서는 인디안 무희처럼 목에 걸고 다녔다. 그밖에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결혼식을 올리는 초례청(醮禮廳)에는 으레 동백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꽃이 핀 것은 그대로 쓰고 아직 꽃이 안 피면 대신 조화를 매달았다. 그것을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집례자가 '신부出'을 외치면 그 꽃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어 꺾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동백꽃을 생각하면 노래 어느 가사에 나오는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을 가니...' 하는 대목처럼 추억을 더듬어 동백꽃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이런 자작시를 읊조린다. 물빛도 고운 고장 동백의 고장 / 오동도 동백꽃은 붉기도 해라./터지는 꽃술에 서린 그 절개/ 오래토록 기억될 정절이어라./ 나그네 옷깃 여미게 하는 정령이어라. 지금은 봄기운이 한창이다. 이 때면 오동도는 온통 붉게 피어난 동백꽃으로 성찬을 펼친다. 추억거리가 그리운 사람, 아니 젋은 연인끼리나, 함께 살아 살가운 정이 그리운 사람은 한번쯤 와서 걸으면 좋을 것이다. 지금 오동도 동백꽃은 해풍에 맑게 얼굴을 씻고 찾아온 이를 반겨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2000년) 임병식. 1989한국수필로 <천생연분>으로 등단. 여수문인협회지부장 역임. 한국수필작가회장 역임 한국수필가 협회 공영이사 역임 수필집‘지난세월 한 허리를’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