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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회 여수거북선축제 ‘대박’…3일간 ‘39만 명’ 방문제53회 여수거북선축제가 방문객 39만 명을 기록하며 흥행 대박을 터트렸다. 여수시(시장 권오봉)는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이순신광장과 선소 일원에서 펼쳐진 여수거북선축제가 각종 프로그램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7일 밝혔다. 축제위원회는 3일간 방문인원을 39만 1600명으로 추산했다. 날짜별로 보면 통제영길놀이가 펼쳐진 3일은 11만 7600명, 4일은 15만 4000명, 5일은 12만 명으로 집계했다. 축제기간 전통과 현대 문화 프로그램,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등은 방문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그 중에서도 통제영길놀이와 드론 라이트 쇼, 선소 패밀리 테마존이 특히 인기였다. 축제 시작을 알리는 통제영길놀이는 행사 구간을 서교동로터리부터 이순신광장까지로 축소해 작품성과 관객 몰입도를 높였다. 길놀이에는 여수석유화학고 취타대, 여수북놀이, 국제자매우호도시 대표단, 26개 읍면동, 9개 초등학교 등 53개 팀 4300여 명이 동참해 여수거북선축제가 시민참여형 축제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줬다. 3일 이순신광장과 4일 선소에서는 드론 라이트 쇼가 아름다운 여수 밤하늘을 수놓으며 관람객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날 드론 100대는 이순신 장군, 거북선, 판옥선, 학익진, 첨자진 등 9가지 이미지를 형상화하며 여수거북선축제와 4차 산업 혁명의 만남을 선보였다. 선소에 마련된 패밀리 테마존은 체험 프로그램, 버스킹 공연, 모형등, 가장물 관람, 어린이 인형극, 거북선 그리기‧만들기, 청년․청소년 페스티벌 등을 즐기려는 가족 단위 방문객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와 함께 4일 학동 선소상가 거리에서 열린 HOT ROAD 페스티벌은 축제 방문객에게 보다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며 상승효과를 냈다. 시는 패밀리 테마존과 HOT ROAD 페스티벌이 시민화합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밖에도 4일 오후에는 거북선대교~이순신광장~돌산대교 앞 해상에서 어선, 해군 3함대 고속정, 해경 함정, 거북선 유람선 등 선박 44척이 전라좌수영 수군 출정과 승리 퍼레이드를 생생하게 재현했다. 지역 아이들에게는 임진왜란 육상‧해상 유적지 순례 프로그램을 통해 역사 교육의 장도 제공했다. 여수시에서는 행정대집행을 통해 난장 없는 깨끗한 축제장 조성에 이바지했다. 권오봉 여수시장은 “여수시민과 축제추진위원회, 경찰서‧해양경찰서‧소방서 등 유관기관과 자원봉사자의 협조와 성원 덕분에 이번 축제를 안전하고 훌륭하게 치룰 수 있었다”며 “여수거북선축제가 전라남도 대표축제를 뛰어넘어 문화체육관광부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될 수 있도록 부족한 점은 보완하고 잘된 점은 더욱 발전시켜 가겠다”고 말했다. ▲ 제53회 여수거북선축제 ‘개막식 축하 불꽃’ ▲ 제53회 여수거북선축제 ‘드론 라이트 쇼’ ▲ 제53회 여수거북선축제 ‘해상수군출정식’ ▲ 제53회 여수거북선축제 선소 ‘패밀리 테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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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 ‘제474주년 이충무공 탄신제’ 봉행여수시(시장 권오봉)가 오는 28일 오전 10시 충민사에서 ‘제474주년 이충무공 탄신제’를 봉행한다. 시는 매년 이충무공의 탄신을 기념하고 호국충절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제례는 취타대 연주와 함께 여수시 고재영 부시장의 입장으로 시작한다. 입장로 좌우에는 수군 24명을 배치해 엄숙함을 더했다. 수군은 부시장에게 예(禮)를 표하고 구호를 외친다. 이날 장인식 해양경찰서장, 정준호 여수향교 전교, 장전훈 충민사 원사는 각각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으로 제례에 참여한다. 제례 후에는 이순신 학교에서 성웅이순신가를 합창하고, 폐제 고지와 고재영 부시장의 퇴장으로 모든 행사가 마무리된다. 충민사는 1601(선조34)년 왕명으로 건립된 이충무공 사액사당 제1호이자 국가사적 제381호다. 시 관계자는 “전라좌수영 본영인 여수에서 탄신제를 통해 이충무공의 구국정신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시민들에게 제례와 예(禮) 등 전통문화를 알릴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여수시는 이충무공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충효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오는 5월 3일부터 5일까지 ‘제53회 여수거북선축제’를 개최한다. 이번 축제는 이순신광장과 선소 일원에서 ‘진남호국의 얼, 만세 불빛이 되다’라는 주제로 펼쳐진다. ▲ 지난해 열린 제473주년 이충무공 탄신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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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회 여수거북선축제’, ‘5월 3일’ 개막2019년 문화관광 육성축제이자 전라남도 대표축제인 ‘제53회 여수거북선축제’가 오는 5월 3일부터 5일까지 이순신광장과 선소 일원에서 개최된다. 여수시(시장 권오봉)는 ‘진남호국의 얼, 만세 불빛이 되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축제를 시민과 관광객이 어우러진 관광 체험형 축제로 만들 계획이다고 밝혔다. 축제 첫날인 5월 3일은 고유제, 이순신장군 동상 참배, 통제영길놀이, 개막식, 드론 라이트 쇼 등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을 역동성 있게 그려낼 예정이다. 둘째 날에는 둑제와 연계한 전라좌수영 수군출정식, 해상 퍼레이드, 소년이순신 선발 대회 등으로 통해 축제 열기를 이어간다. 셋째 날에는 5관 5포 지역 매구 경연대회, 용줄다리기 대회, 여수거북선가요제 등을 끝으로 제53회 여수거북선축제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번 축제의 대표 프로그램은 통제영길놀이다. 길놀이에는 시민 4000여 명이 참여해 임진왜란의 전란사를 재현한다. 거북선, 판옥선 등의 가장물을 통해 만나는 이순신 장군의 생애는 축제의 백미로 꼽힌다. 시는 관객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올해 길놀이 구간을 서교로터리에서 이순신광장까지로 단축했다. 또 읍면동 길놀이 경연대회 시상금을 2000만 원으로 늘려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발굴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드론 100대가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해전진법과 거북선, 이순신장군 등을 형상화하는 드론 라이트 쇼를 축제에 도입해 볼거리제공과 함께 축제의 선진화를 꽤 했다. 이밖에도 내실 있는 축제장 운영을 위해 주행사장을 종포해양공원에서 이순신광장으로 옮긴 점도 눈에 띈다. 축제 기간 선소 일원에는 가족단위 시민과 관광객을 위해 거북선, 판옥선, 모형등을 배치하고 어린이 인형극, 버스커 공연, 드론 라이트 쇼, 거북선 만들기 대회 등도 펼쳐진다. 축제 참여자는 임진왜란 육상유적지 순례, 신호연 체험, 타루비 탁본체험, 수군복‧구군복 체험, 좌수영 낭만버스 투어 등의 다양한 체험행사도 즐길 수 있다. 27개 읍면동에서는 지역 대표 특산품으로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며, 지역 청년과 사회적 기업도 축제에 참여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한다. 시 관계자는 “여수거북선축제가 대한민국 문화관광축제에 진입할 수 있도록 축제 준비와 손님맞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풍부한 이번 축제에 많은 시민과 관광객의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 제53회 여수거북선축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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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 한려지구, ‘134억 투입해 도시재생한다’여수시 한려지구가 지난 8일 2019년 도시재생 뉴딜 공모사업 대상지에 선정됐다. 시는 올해부터 2022년까지 국비 80억 원 포함 총 사업비 134억 원을 한려지구에 투입할 계획이다. 주요 사업 내용은 청소년 돋움주택 건립, 노후주택 및 공‧폐가 정비, 어울림센터‧청년몰‧비즈니스센터 조성, 마을박물관‧마을도서관 건립, 지역축제 개최, 주민역량강화 사업 추진 등이다. 또 민간자본 유치를 통해 사업 대상지 내에 있는 성매매집결지의 주거지 환경 정비를 진행할 방침이다. 시는 지난 2월 국토부에 뉴딜사업 신청서를 제출했고, 지난달에는 발표평가를 진행했다. 지역주민이 직접 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특색 있는 사업을 발굴한 점이 좋은 평가를 이끌어 냈다. 전문가 자문과 행정 지원을 통해 내실 있는 공모 신청서를 작성하고 현지 방문 평가위원에게 사업 필요성을 적극 설명한 것도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시 관계자는 “이번 사업이 주거 환경 개선뿐 아니라 일자리와 소득 창출을 불러올 것으로 기대한다”며 “사업이 원활히 추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여수시는 올 하반기에 국동지구와 전라좌수영 동헌지구의 도시재생 공모를 신청할 계획이다. ▲ 2019년 도시재생 뉴딜 공모사업 대상지에 선정된 여수시 한려지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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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따라잡기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사적 제523호(하)-여수 석보는 평지에 축조된 방형의 성곽시설... -해안지역의 관방 유적으로 이순신 관련 관광자원 활용도 높다... 난중일기 중에서... 임진 4월 18일(정미) 아침에 흐림(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방이 석보창에 군사를 인솔하고 오지 않으므로 붙잡아 가두었다). 壬辰 四月 十八日 丁未 朝陰 (夕 順天領軍兵房 留在石堡倉 不爲領付 故捉致因禁 ) 병신10월 5일(무진) 흐림(남양 아저씨가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일찍 부르기에 다녀왔다. 남해현령(박대남)과 함께 이야기 했다. 비 올 징후가 많다. 순천부사(배응경)은 석보창에서 잤다). 丙申 十月 五日 戊辰 陰 ( 南陽叔主大祭早招 故往來 與南海話 多有雨徵 順天宿石堡倉 ) <고지도에 나오는 여수석보> 여수석보는 당시 널리 축조되었던 산지나 평산지역에 마련한 성곽과 달리 평지에 마련된 방형의 소규모형태의 석보로 출발하였다. 남벽은 178m, 서벽은 171m, 북벽 186m, 동벽은 168m 내외로 성벽 전체 둘레가 703m 내외이다. 남벽은 남벽중앙의 추정 문지를 중심으로 동서방형으로 일직선으로 축조된 성벽으로 남문지의 동측 약15m 지점에 치(雉) 또는 적대(敵臺)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고, 이런 치는 평지성에 있어서 각 방면에 성벽에 2~3개 정도는 마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한 곳만 보이고 있으며, 성벽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다른 방향의 성벽보다 양호한 편이다. 동벽은 남북방향에서 약10°정도 동남쪽으로 기울어진 직선형의 성벽으로, 현재는 성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벽의 바깥쪽에 마련된 대로를 따라 동문 쪽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다. 석보가 활용되고 있었던 시기에도 동문의 활용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동벽은 비교적 유구가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고, 동벽중앙에 동문지가 마련되어 있지만, 동벽 북쪽지역은 민가가 있었던 곳으로 성벽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다. 북벽은 다른 성벽에 비해 다소 길다. 북벽외부는 성벽가까이까지 농으로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성벽의 지대석(地臺石)까지 노출되는 등 성벽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서벽은 다른 방향의 성벽보다 보존상태가 상대적으로 나쁜 상태이며, 성벽의 중심지에 추정되는 서문지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은 곳이다. 서벽의 남쪽구간은 그간 과수원으로, 북쪽은 논으로 이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성벽가까이로 관개수로가 있고, 서남쪽의 성벽유구는 성벽의 뒤채움 돌만 남아 있는 정도로 훼손정도가 심한 편이다. 여수석보의 성문은 남문지와 동문지 등이 확인되었으니, 서문지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정확한 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여수석보는 소규모의 석보로 출발한 성곽이기 때문에 성문을 각 방향마다 모두 두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 지고 있으며, 북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남문지는 남벽중심지역에 마련되어 있는데, 폭4.7m 길이 8.7m 내외로 문루(門扉)는 성벽외부에서 안쪽으로 약 1.5m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로에는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문지도리석이 보이고, 박석(薄石)이 노출되어 있어 이곳에 마련된 문루는 초석을 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누문식(樓門式)형식으로 추정된다. 동문지는 동벽의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약20m 북쪽에 위치하나 명확한 문지유구가 노출된 것은 아니지만 폭4.7m 통로 폭 7.7m로 남문과 비슷한 규모로 추정된다. 문지에는 문지도리석이 보이고 내부에는 통로를 구성하는 측벽의 성돌이 보이고, 이곳의 문루도 남문지와 같은 형태의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수석보 내 성내시설에는 주로 건물지, 주거지, 연지 및 우물지 등이 조사 발굴되었다. 건물지에는 활용목적에 따라 관아 건물을 비롯한 다양한 건물과 창성(倉城)으로서 가장 상징적인 대규모의 창고(倉庫)건물지 등이 있었다고 보여 진다. 현재까지 성내 여러 곳의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으나, 그간 성내에는 지반 교란이 심하여 제대로 원상이 보이는 건물유구는 적은 편이다. 가장 남쪽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초석지의 위치에서 건물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성내 중심부에서 약간 동쪽에 위치한 곳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거주지가 26기 정도 확인되고 있다. 조선시대 석보 이전부터 생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나, 한 곳의 주거지를 시대적으로 계속 이용함으로써 건물유구나 유적이 혼재함을 알 수 있다. 성곽에서 필수적인 시설의 하나가 연지를 비롯한 취수시설이다. 여수석보에는 성내에 우물이 3개소 있다고 한다. 우물지는 성의 중심에서 남서쪽 36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면상 원형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육각에 가까운 형태이다. 내경이 1.6m이고, 외경이 2.7m 내외, 우물깊이는 2.1m로, 우물을 조성하기 위해 사용된 석재는 30~40cm 정도의 할석을 사용하고 있다. 연지는 성의 서쪽중앙에서 남북으로 길게 조성된 연지유구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모를 둥글게 한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길이 20.6m, 폭9.5m,길이 0.9~1.4m 내외로 호안을 전부 석축으로 하지 않고, 상부의 태두리만 석축한 형식을 띠고 있다. <여수 석보 남문지/적대/해자/남쪽 성벽 등> 여수석보 성외의 대표적인 시설은 해자이다. 여수석보는 평지성이기 때문에 해자의 필요성은 다른 성들에 비해 필요성이 큰 편이었다. 여수석보의 해자는 성벽에서 약 5.5m내외의 거리에 폭은 4.5~5.0m, 깊이는 1.0~1.4m내외의 석축으로 조성된 형식으로, 성의 와벽을 따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깥에 마련되어 있었다. 특히 동문지로 통하는 외부의 해자가 진입도로로 인하여 절단되어 있었고, 동문지 앞에는 해자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수 석보는 조선 시대(15세기 중반) 널리 활용되었던 산지나 평산 지역이 아닌 평지에 축조된 방형의 성곽시설인데, 3차례의 발굴조사와 학술대회 등을 통하여 유적의 성격을 확인하였다. 여수 석보는 처음에는 군사적인 방어위주의 석보(돌로 쌓은 성)에서 출발하여 점차 관청용 물자비축의 창고와 장시(시장) 기능으로 활용되는 등 다양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주목되는 유적이다. 또한 체성부(성벽의 몸체 부분)와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의 잔존상태가 양호하다. 15세기 중반 평지부에 방형으로 축조된 육군 진보(각 지방을 지키던 군사조직이 주둔하던 소규모의 성)로서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을 세워쌓기한 점, 대형의 지대석을 사용한 점 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기 힘든 시대적인 한정성·희소성을 지닌 귀중한 유적이다. 여수 석보는 조선시대 성곽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여수 석보의 성벽은 외벽 바깥쪽 1m 범위에서부터 내측의 약 4.15m~4.5m까지 약 5~5.5m 구간의 지면에 20cm 내외의 쪼갠 돌을 거칠게 다듬은 할석재와 판석재를 깔았다. 성벽 등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터에 쌓은 돌인 지대석을 놓은 후 외벽을 돌로 쌓고 그 뒷면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우는 뒤채움을 한 후 성벽의 윗부분과 성벽 안쪽으로 흙을 경사지게 덮어 마무리한 내탁법으로 축조하였다. 지대석 위에 20~30cm 가량 뒤로 물려 1~2.6m 정도의 대형 할석으로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의 성돌을 세워서 쌓는 특징을 보여 준다. 2단부터는 상부로 갈수록 작은 성돌을 사용하여 쌓은 조선시대의 성곽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으나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의 성돌을 세워쌓기한 점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양상이다. 특히 성곽의 네모서리의 각을 죽여 둥글게 처리한 점에서 다른 성곽과 차별성을 보이는 성이다. 여수 석보는 전라도 육군이 외적 방어의 임무를 맡아 보는 대표적인 요충지에 축조된 관방시설로서 기능하기 시작하여 세금을 수납하여 보관하던 창성 및 장시 등의 사회·경제적인 기능으로의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변화모습을 잘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한 복합유적이다. 여수 석보는 해안 지역의 관방시설을 비교 분석 할 수 있는 유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남해안과 순천 등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여러 교통로가 교차하는 결절점에 위치하여 군사·교통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하였고. 시공간적으로 변화가 이루어졌던 조선시대의 창성과 장시 등을 연구할 수 유적공간이다. 현재 여수국가산단의 진입로에 위치하여 과거의 교통로의 결절점임을 입증하고 있다. 인근의 여수 흥국사와 묘도 및 전라좌수영의 유물·유적과 연계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도를 높일 수 있는 유적이다. 또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여수 석보(석보창)를 활용하여 여수지역에 산재해 있는 이순신 관련 유물·유적과 연계하여 ‘호국충절의 도시 여수’임을 재삼 강조할 수 있다. <여수 석보 동문지내 비석> 동문지 내에 비석이 2기가 있다. 모두 전·후면이 마모되어 있지만, ‘水軍節度使李公寅熙永世不忘碑’·‘水軍節度使金公魯甲恤民善政碑’라 음각되어 있다 전해진다. 여수 석보의 복원을 통하여 주변 경관을 정비하고, 여수 석보촌 민속마을 조성하여 창성과 장시의 옛 모습 등을 재현한다면 여수 석보가 가지고 있는 복합유적으로써의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다. -민대기 문화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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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따라잡기)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사적 제 523호 (상)-민대기 문화재학박사 난중일기에도 석보창에 관한기록이 임진4월18일(정미)와 병신10월5일(무진)에 전해지고 있다. 임진4월 18일(정미) 아침에 흐림(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방이 석보창에 군사를 인솔하고 오지 않으므로 붙잡아 가두었다). 병신10월 5일(무진) 흐림(남양 아저씨가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일찍 부르기에 다녀왔다. 남해현령(박대남)과 함께 이야기 했다. 비 올 징후가 많다. 순천부사(배응경)은 석보창에서 잤다). 여수 석보(국가사적 제523호, 2012.06.22 지정)는 여수시 여천동 86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석창이라는 명칭은 남아 있지 않지만, 주변은 모두 성내마을 또는 석창이라 불린다. 이곳은 여수 각 지역과 인근 순천시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다. 석보는 외적이나 왜구의 노략질에서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석축 시설물로서, 조선시대 수많은 진보 가운데 하나였다. 진보란 흔히 군사를 주둔시키는 곳 내지 그러한 목적 아래 축조된 성보라는 의미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진보를 ‘邊堡鎭戍’ 즉 변방의 성보로서 군사가 진수하는 곳이라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 외적을 방비하고자 각급 군관의 지휘 아래 군사를 주둔시키거나 혹은 그러한 목적으로 축조된 방어시설 중 내륙의 산성을 제외한 성보들은 모아 진보라는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수 석보의 성곽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이는데,「목책으로 진흙을 바른 성(木柵途泥城)이며, 둘레는 143보」라 하였다. 여수지역에 석보가 들어서는 단초로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존재가 조선 초기 순천도호부에 위치하였다는 소위 ‘목책도니성’이다. 이 성은 현전하는 자료에 의한 석보가 등장하기 이전 여수시의 성보시설로서 기록에 전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공식기록에서 여수를 관장한 성보로는 목책도니성이 최초이며, 바로 그 뒤를 이어 석보가 등장한다. 목책도니성은 변방의 연안지역처럼 별다른 방어시설이 없는 마을의 주민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쌓은 보루였다. 『세종실록』97 (세종24년 8월4일 신유)의 기록에 따르면, 읍성과 멀리 떨어져 방어에 취약한 바닷가 촌락에다 지역별 실정에 맞추어 ‘목책이나 석보 혹은 토축’을 마련함으로써 왜적의 급작스런 출현과 노략질에 대비토록 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수 석보는 둘레가 1,479척이고, 높이는 10척 이내이며 3개의 우물이 있다」고 서술되었다. 여기서 석보란 『여지지』에 기술되어 있는바 석성이며, 여수 석보란 순천부 동쪽 60여리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과거의 여수현이다. 따라서 성곽이 세종 때는 목책이었는데, 성종 때는 석성이었다는 것으로서, 현재의 석성은 세종대에서 성종대 사이에 쌓아진 것으로 보여 진다. 여수 석보의 존재를 알리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세조 3년(1457)이다. 『세조실록』6 (세조3년 정월 16일 신사) 하삼도의 여러 가지 진포를 몸소 살핀 도순찰사 등이 보고한 조목들 가운데 – 전라도 순천 돌산포의 경우 그 동쪽에 내례가 있고, 북쪽에 여수 석보가 있는데다 바다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서 방어에도 긴요하지를 않으니, 이제 돌산포를 혁파하고 그 선군은 내례와 여도에 나눠 소속시키도록 하소서 – 에 나오는 여수 석보가 그것이다. 성종 10년(1497) 내례포에 전라좌수영을 설치하면서 16세기부터 석보창(창고)으로 기능이 변하고, 난중일기에도 석보창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여수석보는 유일하게 해안으로만 접근이 가능했고, 이를 이용해 조선 중기에는 군수물자를 제작하고,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이 되었다. 여수석보 밖에 생긴 석보촌이라는 곳은 전국에서 모여든 장인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건설한 화치 첨산에서 삼간도 애양원 쪽으로 건설된 긴 방축인 십리방천 때문에 바닷가에 있었던 여수석보의 주변은 벌판이 되었다. 여수석보는 한 변이 170m내외이고, 전체 둘레가 703m내외의 소규모의 평지 방향의 성이다. 몇 년 전까지 여수석보의 동문지 북쪽과 동쪽의 성벽에는 여러 채의 민가와 서남쪽 모퉁이지역의 성곽 상단에도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외 석보로의 주 접근로지역인 동문지 밖에도 여러 채의 민가가 있었다. 또한 석보 내에는 서쪽 성벽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밭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석보의 외부는 논으로 활용되어 잔존유구의 일부가 훼손되기도 하였다. 여수석보는 여수석보성, 석창성, 장시 등으로 변화를 거듭한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시에서는 그간 유적의 보존과 정비를 위해 적극적으로 사유지를 매입하였고, 여수석보의 정비를 위한 지표 및 발굴조사를 지금까지 총3차례 실시하였다. 2003년 대학교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등 3개의 조사기관이 성곽,해자,성내부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성벽을 비롯한 동·남문지 및 해자와 건물지 3동과 집석유구 2개소 등이 조사되었다. 2007년 서쪽지역을 중심으로 서벽과 수구,해자,건물지,우물,연못지 등이 조사되었다. 2014년부터 시작된 3차 조사에서는 중앙중심부와 나머지 부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26기의 주거지 유적 및 유물들이 조사되었다. 여수석보는 성벽과 성문 그리고 성내의 각종 건물지와 외부의 해자와 성내의 주거지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고, 현재는 유적성격의 파악이 가능한 정도로 조사가 이루어진 상태다. 특히 여수석보의 주요시설인 성벽을 비롯한 성문지, 그리고 성내 건물지 등은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유적전체가 뚜렷이 확인되는 정도로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어 다른 성곽에 비해 여전히 양호하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석보(下) 다음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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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 중앙동, 정월대보름 맞이 지신밟기여수시 중앙동 주민자치위원회(위원장 강용명)가 정월대보름을 맞아 주민들의 안녕과 소망성취를 기원하는 지신밟기 행사를 개최했다. 중앙동에 따르면 지난 17일부터 이틀간 주민센터 프로그램 회원으로 구성된 풍물단등 약 8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이순신광장에서 기원제례를 갖고 관내 기관 및 경로당, 사업체 등 곳곳을 순회했다. 특히, 지역 자생단체장과 시장․상가 대표들이 전라좌수영 수군 수사복을 착용하고 함께 어울려 풍물단과 주민들을 격려하면서 주민화합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지신밟기와 더불어 이순신광장에서는 부대행사로 ‘이순신전술신호연 만들기’와 ‘수군 수사복 체험행사’ 부스를 마련하여 여수를 찾은 관광객 약 500여명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강용명 위원장은 “민족 고유의 세시풍속 놀이가 사라져 가는 현실이 안타깝다.